▣全羅 勤王軍
■1637년 1월 4일, 전라감사 이시방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종군했던 金俊龍은 병력 2천 명을 이끌고 수원 光敎山으로 진출, 진영을 설치하고 적 돌격을 차단할 수 있도록 목책을 설치하고, 火器手를 前面에, 射手와 창검병을 후면에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1637년 1월 5일, 청군 지휘관 楊古利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집중사격을 가하여 격퇴했다.
■1월 6일, 楊古利는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공격해 왔다. 선방하던 조선군은 저녁 무렵 청군이 광교산 후방으로 우회하여 광양현감 崔澤이 맡고 있던 지역으로 돌진하자 혼전양상으로 돌변했다. 이 틈에 朴義라는 명포수가 적장 楊古利를 사살하자 청군 진영은 급격히 동요했다.
병자호란 개전 이래 거둔 최대의 승리였고 광교산에서 날아온 김준용의 승리소식에 조정은 환호했다.
그러나 김준용은 계속 버틸 수 없어 수원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남한산성에서는 환호도 잠시뿐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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