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렵 李 大統領은 國務會議와 非常國會의 소집장에 서명한 후 02;00 時 傾, 극비리에 용산역을 떠나, 프란체스카 婦人과 함께 大田으로 가는 기차안에 있었고,
6·25 가 발발한 이튿날부터 남한에 있던 미국인 2000여 명이 비행기와 배편을 이용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음날인 28일 02시15분 한강교가 폭파됐다. 조선인민군의 한강 도하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파죽지세. 북한군은 밀고 내려왔고, 남한은 속수무책이었다.
6月 26日 24;00~27日 02;00時, 蔡 秉德 參謀總長은 各軍 參謀總長이 참석한 國防 首腦 연석회의에서 눈물을 머금고 다음과 같은 요지문을 술회했다.
얼마 전 B-29 機 100 機가 支援한다고 傳했는데, 美軍機가 날라 온 것은 거류민 철수를 엄호할 目的이었다. 美國이 오늘까지 約束하여 준 것은 10日分의 탄약을 공여하여 준다는 것 以外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마저 벌써 때가 늦었다.
美國이 直接 支援해 주지 않는 한 事態는 절망적이다. 陸軍은 主力이 상실되더라도 게릴라전으로 最後까지 항전한다.
海軍과 空軍은 이러한 陸軍의 作戰에 協力하여 最終段階에 이러르면 망명정부의 要人에 대한 수송을 담당하여 주기바란다.
그러고는 6月 27日 아침, 蔡秉德 參謀總長은 美 고문단에 한마디 通告도 없이 陸軍本部를 시흥의 步兵學敎로 옮겨 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