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志 人間戰略
■ 15.劉備의 熟考
동천
2010. 12. 14. 12:02
三國志 人間戰略 ■15.劉備의 熟考 官渡大戰에 이어 劉備를 여남에서 擊破, 中原을 制壓한 曹操는 餘勢를 몰아 大軍을 양자강 유역으로 進擊하고 있었다. 한편, 劉表는大別`伏牛의 두 山脈을 防牌로하여 中國의 大動脈인 양자강을 끼고 호북의 곡창을 掌握하고 있는 터라 "曹操의 來襲이 멀지 않았다!"고 判斷, 緊張하고 있었다. 劉備는 劉表에게 기식하면서 그의 要人들이나 一族들의 질시와 박해 속에서도 劉表의 恪別한 配慮로 가까스로 살아남아 第一線의 要衝地인 신야성의 城主가 되어 기반을 擴大하거나 威力을 偵察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출격해 오는 曹操의 전초부대를 擊退시킴으로써 劉表의 信任을 받고 있었다. 신야성에서 잠시 安定을 되찾은 劉備는 西紀 184年, 군사를 일어켜 한실 再興이라는 명분아래 關羽,張飛,趙雲과 같은 豪傑들이 必死的으로 싸우고 있어 武力에 있어서는 어느 群雄의 軍事보다 强力한데도 싸울 때마다 實效를 거두지 못하고 어언 13年이 지난 지금까지 이지경이니 대체 무엇때문인지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劉備는 생각끝에 그의 軍士는 戰鬪에는 强했지만 그 戰鬪를 適切히 運用하고 그 成果를 有效하게 걷어들이는 戰術`戰略 能力이 모자람을 깨닫고 "황급히 作戰을 考案하고 計劃하고 演出하는 參謀長을 물색해야지." 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의 귀에 맨먼저 들려온 것이 兵法家 諸葛孔明에 대한 소문이었다. - 參考文軒 : 名參謀人間戰略,左手史記 右手三國,三國志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