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9. [申乭石]의 東海岸 遊擊戰鬪
영남 방면 의병 중에서 가장 용감한 활동을 전개한 [申乭돌石]은 국운이 날로 기울고 일제 침략행위가 심하여짐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乙未義兵 때부터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을사조약이 전해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6년 4월, 그의 고향 寧海郡 福坪里에서 家産을 털어 의병을 모으니 그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
[申乭石] 義兵은 寧海邑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가 무기 등 관군의 군수품을 접수하고 주민들을 안주시킨 다음 다시 동해안을 따라 平海邑을 차지하고 다시 병력을 증강하여 蔚珍邑에 들어가니 의병의 수가 3千名에 달하였고 [申乭石] 의병진의 명성은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해 11월경부터는 日月山-白岩山-大遯(둔)山-東大山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진위대와 왜놈 군경대와 유격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같은 [신돌석]의 활동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한 관청에서는 대구 진위대 참령(소령) [朴斗秉] 휘하 200명, 원주 진위대 참령 [李承七] 휘하 100명을 출동케 하였으며 적 왜군과 이들 진위대는 협동작전으로 남쪽으로부터 역습하여 왔다.
하지만 [申乭石] 義兵陣은 太白山脈의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적의 집중 공격을 피하고 산맥 또는 해안선을 따라 적을 유인하여 분산 격멸하면서 寧海 지방으로 내려가 寧海 邑城을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1907년 봄부터는 [白南壽]. [金致憲] 等 용감한 장병을 흡수시키고 또 군대의 강제 해산과 高宗의 퇴위에 분개한 전직 군인들이 합류하게 되니 세력은 더욱 보강되어 일진회 등 친일파를 숙청하고 계속되는 왜군의 습격을 격퇴하여 병오 의병의 한 상징으로 후세에 큰 귀감이 되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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