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자료들 | |
| |
순종황제 (융희) 1875년 세자 책봉. 1897년 황태자에 책봉.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의 강요로 1 907년 헤이거 밀사 사건에 책임을지고 고종이 양위 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서양식 황제 복장을 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
손기정
1936년 8월9일 베르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24살의 나이로 2시간 29분 19초로 결승점을 통과,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으나 가슴의 일장기가 일본 식민 통치하의 나라 현실을 말해주고 있어 마음 아프다. |
| |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자적 용포 입은 임금 모습은 전통적인 의관 차림을 보여준다. 경복궁 뜰에 나와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뒷배경은 지금의 사진관처럼 천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퍼시벌 로엘이 촬영한 것이다. |
흥선 대원군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 시호는 헌의.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 안동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내다가 고종의 즉위로 1863년 대원군에 책봉, 10년간 집권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시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유패 생활을 보내다가 1885년에 귀국하였다. |
| |
신미양요 아시아 함대 선상의 장병(1871) 미국 아시아 함대는 군함 5척, 총병력 1230명 함재, 대포 85문을 장비하고 조선원정 (5월16일 ~ 7월3일) 을 단행했다. | |
명성황후 장례 준비(1897년)
명성황후의 시신은 일본 낭인배에 시해되어 불에 탄 뼈 조각과 숯덩어리뿐 이었다.
운구준비를 위해 임시 사당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명성황후 시신은 보자기에 쌓여져있다. | |
1910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의사-(당32세) 여순(만주)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 |
| |
한말 군인 | |
| |
항거하는 독립군 | |
| |
철도 방해죄로 독립군 처형 (1905년)
처형되는 세 사람은 김성남. 이춘근. 안순서이다. 1904년 9월 오전에
용산 마포간 철도부근 야산에서 처형되고 있는 현장의 사진이다. | |
| |
로일전쟁 당시의 의병 처형(1904년)
이와 같은 장면은 일본 통치 후 3.1 일 운동에도 재현되어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손을 뒤로 묶고 철사줄로 목을 매어 치명적으로 처형시켰다.
비참한 이 광경을 볼 때마다 탄압이 주는 일본의 만행은
무엇을 위한 선택 이었는지 묻고 싶어진다. | |
| |
항의하는 농민 처형 (1905년)
당시 일본 통치하에 있는 한국인들은 재판 없이 체포되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 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민족의 애환은
국권을 지키지 못한 무능정부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중앙에 있는 일본 관헌은 복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다. | |
| |
영친왕 일본 유배-1905
이등방문은 1905년 11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 총감이 되었다.
영친왕은 11세 어린나이로 도일했으나 내용은 인질과 다름이 없었다.
영친왕의 정식 칭호는 영왕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왕실을 격하시키려고
'친' 이란 단어를 넣어서 영친왕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의왕을 의친왕으로 개칭 격하했다. | |
| |
1904년 좌측이 이승만씨 (미국) | |
| |
안중근 마지막 유언(1910)
일본 헌병대에게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사형 당하는 그날까지 애국충정으로 더욱 당당했다.
사형을 2일 앞두고 여순 감옥에서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은
프랑스 신부 홍석구씨와 두 동생이
형님의 유언을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 |
| |
1930년 항일 학생 교화시간 일장기 좌.우 충효가 무엇을 강요하는 것일까? 모두 죄수복장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 |
| |
남자현 여사 사진
손가락 2절을 잘라서 배포에 '조선독립원' 이라는 혈서를 쓰고 손가락을 조사국에 보내 우리의 독립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한
독립운동가 이시며
1933년 62세로 하얼빈에서 별세하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 |
| |
신채호 선생님 35세 북경으로 가서 중국신문 중화일보의 논설을 하셨으며,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10년형을 받고 옥중에서 별세. 세분 중에 제일 왼쪽 분 이시다. | |
| |
서대문 형무소 구치장 내부-(여름) | |
| |
부관 연락선
1921년 부산 부관(부산~시모노새끼) 연락선 출항 직전. 당시 이 연락선은 조선인을 전쟁터 또는 공사장으로 수송하여
일본 중국 등 제 삼국의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다.
(이 배를 타고간 많은 한국인은 되돌아 오지 못 했다) | |
| |
놀이터가 된 궁궐-(1929)
처마 밑에 일장기로 장식되고 문짝은 유리로 바꾸어놓고 아동관이라 홍보하고 있다. | |
| |
배델 1904년 영국 통신원으로 로일전쟁 취재차 내한했다가 양기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고 일본침략을 기사로 우방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한국판과 영문판을 발간하다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고 다시 입국하여 190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
박재혁의사 비-1920년
박재혁 투사는 부산 경찰서장에게 면담 후 책속에서 폭탄을 꺼내들어 서 장앞에 던졌다. 박재혁 선생은 오직 조국을 위해 깨끗이 목숨을 바쳤다. |
| |
독립군 수난 1919년 두손들고 만세부르다 일본경찰대에 검거되어 한 쪽 팔이 짤렸다. 사진에 외과 안내판이 보인다. 팔이 짤린 한국인은 눈동자 초점이 없이 땅만 바라 보고 있다. | |
| |
통감부 파출소 1909년, 1910년 조선은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각서를 조인했다. 사냥개까지 동원하여 항거하는 독립군을 수색하는 데 이용했다. | |
꼭기억하여 잊지못할그날을 상기합시
| |
소정각-명성왕후(민비) 화장된 곳
명성왕후의 시신이 일본 낭인배에 의해 소 정각 정자앞에서 불태워졌다. 조문객들이 가슴에 검은 상장을 달고 모여 있다. ---(일본 낭인배들이 옥호루에 난입하여 시해함)--- 민비는 일제가 명성왕후를 함부로 부르기 위해 붙인 것이다. |
옥호루 명성황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제가 일본 낭인배(깡패)를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 옥호루에 난입 하여 시해함. 옥호루에서 시해된 후 며칠이 지나 명성왕후의 새끼손가락이 문틈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이 건물은 궁중의 나인들이 자주 사 용하던 곳이며 오른 쪽에 아궁이가 있어 나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부엌이다. 뒷편에 박물관 상단이 보인다. |
| |
학도병 출옥 1940년 형무소 출옥 당시 모습--(학도병) 피골이 앙상한 체구는 X선에 나타난 형상과 같아 보인다. | |
| |
민족해방 책임자-박달씨 1936년 민족해방 책임자로 체포도 항일 투쟁본부 책임자 박달씨- (우측에서 3번째)-가 딸과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고 있다. 심한 고문으로 옥사 했다. | |
| |
광복단 사건 1920년 광복단 사건 발생 광복단 사건으로 인하여 주동자를 즉석에서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고 있다. | |
| |
안중근 의사 1909 년 이등방문 암살.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 당시 체포되어 법정에서 촬영-(안중근) |
조선 유해 보관소-1940년 전쟁 중 소식 불명이 된 유해가 일본에서 임시 보관되었다가 얼마 후 한국에 인도 되었었는데 성명을 알 수 없는 유해는 조선이란 보자기에 쌓여 있다. |
| |
1920년대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신궁 참배--(매일 아침마다) | |
| |
시체 수송--(1930) 조선인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중국인 노무자들이 관을 운송하고 있다. | |
| |
한일합방 동의 전달--(1910)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마침내 한일합방 조약을 공포하니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히 일본에 탈취 되었다 | |
북간도 독립군 모습 일본 75연대와 대항하기 위해 야산에 은신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 |
| |
독립신문 편집 | |
| |
임시정부 요인-(1940) 중앙 앞줄 김구 선생님 | |
| |
살기위한 도전 부모를 여의고 혼자 살아 남은 어린 소녀가 혼자서 짐보따리를 챙기고 있다. | |
| |
일송 김동삼 선생 단기(4252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 중국 연해주 지역에서 광복활동. | |
| |
이동녕 선생 중국 복장으로 촬영되었다. 이동녕 선생의 시구절 일부. <국내공기 가슴이 답답 망명의 자유가 바람처럼 그리워....> | |
| |
독립군 재판-(1920) 애국지사를 체포하여 즉석재판을 하는 광경이다. 일본 경찰들은 장검을 들고 재판 분위기를 위협하고 있다. | |
| |
간도 국민회소속-(1910)
북간도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압송 직전 주막집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젖먹이 아이까지 있다. | |
| |
형장으로 호송되는 독립투사-(1904) 눈을 가리고 인력거에 태워져 형장으로 가는 독립투사. | |
| |
독립군 | |
| |
민족의 수난 일가족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 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모습이다.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눈덩이에 심한 상처가 보인다. | |
전시된 유골들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 된 유골들. 잔혹한 행위에 무참히 숨져간 수많은 영혼들을
무엇으로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
'포토로그 > 追憶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1954년의 한국 모습 (0) | 2009.12.28 |
---|---|
24.긍정의 생각은 기적을 낳고 (0) | 2009.12.22 |
20. 60년대 살기가 궁핍했던 시절 (0) | 2009.08.26 |
19. 30년 전의 추억 (0) | 2009.08.24 |
18. 100년전 장날 (0) | 2009.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