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 李 斯 의 最後 ■ 李斯의 最後 그로부터 2世 皇帝는 宮中에 틀어박힌 채 오직 趙高만을 상대하여 政事를 처리함으로 丞相인 李斯마져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 놓고는 丞相 李斯에게 말한다. 지금 함곡관 동쪽에는 난적들이 기세를 떨치고 있는 판에 무모하게 아방궁 役事를 진척시키고 있어 百姓.. 史 記 2010.02.08
59.■ 一葉蔽目 不見太山 ■ 一葉蔽目 不見太山 B.C. 209年 4月, 나라 안을 순행하던 2世 皇帝가 돌아와 始皇帝가 발주한 아방궁 공사를 완공하고자 전국에 대 동원령을 내려 5萬名을 징집하고 이를 함양의 둔영에 상주시켜 활쏘기등의 훈련을 연마케 했다. 하여, 軍用馬 等의 사료와 수송 비용은 징발된 농민에게 자.. 史 記 2010.02.08
58.■ 胡亥 皇帝와 趙高 ■ 胡亥와 趙高 2世皇帝 胡亥는 先王의 後宮 가운데는 아이를 낳지 않은 女人들이 많다. 이들을 그대로 後宮에서 보낼 수 없다하여 모조리 自決을 命令했다. 秦始皇의 유해가 매장된 후,墓道의 中間 門을 닫을 때 바깥 門도 닫아 버려 기술자들이 모두 그 속에 갇혀 생죽음을 당하도록 만.. 史 記 2010.02.08
57. ■ 胡亥 皇帝와 趙高 ■ 胡亥와 趙高 李斯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눈물이 뺨을 적셨다. 亂世에 태어나 이런 치욕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李斯는 끝내 조고의 뜻에 同意하고 만다. 그리하여 승상의 이름으로 公子 胡亥를 太子로 받들 것을 발표하고 변방에 있는 큰아들 부소에게 始皇帝의 .. 史 記 2010.02.08
56. ■ 胡亥皇帝와 趙高 ■ 胡亥와 趙高 丞相님! 自身과 몽염을 比較한다면 어느쪽이 强하다고 생각하십니까? 能力과 功積, 將來를 내다보는 眼目과 天下의 人望을 얻고 있는 점, 또 큰아들 부소의 信任을 받고 있는 점에 대해 말씀해 보시죠. 어찌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오? 나는 폐하의 조칙을 받들.. 史 記 2010.02.08
55.■ 胡亥 皇帝와 趙高 ■ 胡亥와 趙高 B.C. 221年, 天下를 統一한 秦始皇帝는 새로 넓힌 領土를 中心으로 대대적인 初度巡視에 나선다. 始皇帝의 巡行은 모두 5次에 걸쳐 있었는데, 1次 : 220年 西北地方 2次 : 219年 東方 및 南方地方 3次 : 218年 東方地方 4次 : 215年 東北地方 5次 : 210年 南方地方이다. B.C. 210年, 始皇.. 史 記 2010.02.08
54. ■ 始皇帝의 天下統一(3) ■ 秦始皇이 統一(3) 한편, 統一의 大業을 이룬 秦始皇은 대대적인 制度改革을 斷行하였는데, 상앙의 制度를 근간으로 全國을 36個 郡縣으로 區劃하고, 責任者를 임기제로 任命하여 수천년간 이어온 封建體制를 종식하였고, 조악한 상형문자를 개선하여 隸書體로 文字를 統一하였다, 또.. 史 記 2009.07.16
53.■ 始皇帝의 天下統一(2) ■ 秦始皇 天下 統一(2) 이와 같이 統一을 위한 基盤이 그의 갖추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秦王 "政"이 卽位 즉시 統一政策을 推進하지 못한 것은 그의 나이 13歲에 불과하였고 여불위의 존재와 혈통 시비 등으로 내부적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呂不葦를 추방하고 그 후임으로 강력한.. 史 記 2009.07.14
52. ■ 始皇帝의 天下統一(1) ■ 秦始皇이 統一(1) 吳나라가 亡하고 秦始皇이 統一하기까지의 戰國時代를 시대별로 구분하면, 第1期(B.C.403~330) 覇公國이었던 晉나라가 韓, 趙, 魏 세나라로 分離 獨立함으로써, 戰國七雄이 자리매김 第2期(B.C.330~300) 合縱과 連橫의 時期 第3期(B.C.300~240) 戰國四君時代 (맹상군, 평원군, 신.. 史 記 2009.07.12
51.■李斯 와 韓非子(5) ■ 李斯 와 韓非子(5) 李斯는 자기보다 재주가 뛰어난 韓非를 猜忌하는 마음이 强했고, 韓非가 重用되면 그로서는 不利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宮廷으로 들아가 秦始皇에게 말했다. 지금 秦나라는 天下統一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韓非는 韓나라의 .. 史 記 2009.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