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李斯 와 韓非子(4) ■ 李斯 와 韓非子(4) 이러한 信賞必罰을 바탕으로 한 韓非의 法家思想은 秦始皇의 性格과 꼭 맞아 떨어 졌고, 그 中에서도 儒者는 文으로써 世上을 어지럽히고, 俠者는 武로써 世上을 어지럽힌다. 그런데도 君主는 이들을 한결같이 禮遇하니, 이야말로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까닭이다. 여.. 史 記 2009.07.10
49.■ 李斯 와 韓非子(3) ■ 李斯 와 韓非子(3) 이 무렵, 韓나라에 "韓非"라는 뛰어난 人才가 富强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글을 썼는데, 韓나라 王 "안"(滅亡한 나라의 마지막 王이라 시호가 없음)은 이를 採擇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敵國인 秦始皇은 韓非子의 글을 읽고 感動하여, "아~ 寡人이 이 사람을 만나 사.. 史 記 2009.07.09
48. ■ 李斯 와 韓非子(2) ■ 李斯 와 韓非子(2) 이러한 李斯가 追放令이 내려져 마땅히 갈곳도 없는 그로서는 억울한 생각이 들어 旅館에 머물면서 秦始皇에게 글을 써 올렸다. 옛날 秦목공이 秦나라 터전을 이룩한 것은 百里奚(백리해)와 騫叔(건숙) 덕분이며, 秦효공이 秦나라 國法을 세운 것은 상앙 덕분이며, .. 史 記 2009.07.09
47. ■ 李斯 와 韓非子(1) ■ 李斯 와 韓非子(1) 秦 始皇이 13歲의 어린나이에 卽位하여 27勢가 되던 해인 B.C. 227年에 있었던 일이다. 바로 이해에 秦始皇은 그의 生父이면서 秦나라 제일의 功臣으로 富貴와 榮華를 누리고 있는 現 宰相 "여불위"를 除去하지않고는 統一의 大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에 .. 史 記 2009.07.03
46.■ 呂不葦(2) ■ 呂不葦(2) 權不十年, 好事多魔라 했던가. 秦莊襄王(異人)이 죽자 過去의 愛妾이고 지금의 太后인 조희와 呂不葦의 간통이 宮闕 內에서 다 아는 비밀로 지속되었고 政王의 血統까지 疑心하는 목소리가 宮中 內外로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呂不葦는 조희에게 "노애"라는.. 史 記 2009.07.02
45.■呂不葦(1) ■ 呂不葦(1) 戰國時代 末記에 有名한 巨商이었으며, 秦始皇의 生父가 되기도 하는 時代的 기린아이다. B.C.261年, 秦소양왕 46年 , 呂不葦는 우연히 趙나라 首都에 인질로 와 있는 秦나라의 王孫 "異人"과 運命的인 만남을 갖게 된다. "異人"은 强大國 秦나라의 世子인 安國君의 소생이라고.. 史 記 2009.07.01
45.子 貢 子 貢 孔子의 愛弟子에 안희와 子貢, 이 두 사람은 같은 孔子의 弟子이면서도 아주 對照的인 개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안희는 풍부한 才能의 소유자로서 기대를 한몸에 모으고 있었으나 歲上에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아,누추한 곳에서 궁하게 살다가 죽었다. 이에 比하여 子貢(B.C. 520∼456)은 말재주.. 史 記 2009.06.30
43.孔子가 楚나라로 간 까닭 孔子가 楚나라로 간 까닭 孔子가 魯나라 政權을 掌握하면서부터 治國이 잘 되어 길에 物件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되니 이웃의 齊나라 景公은 이웃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 危脅을 느끼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러한 景公을 보다봇한 臣下 "여차(黎且)"는 이렇게 말.. 史 記 2009.06.15
42. 孔子의 政治論 孔子의 政治論 섭(葉)나라 公子 "高"가 孔子 에게 政治에 대하여 물으니. 孔子는 對答했다. 政治란 가까이 있는 자를 기쁘게 하며, 멀리 있는 자는 그리워서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魯나라의 애공이 孔子에게 政治에 대하여 묻자, 그는 이렇게 對答했다. 政治는 賢人을 選擇하는 일입니다. 齊나라 .. 史 記 2009.06.05
41,毛 遂 毛 遂 B.C.258年, 秦나라 소양왕 때 <범수>의 공작으로 조나라의명장인 무안군 백기 장군을 죽게한 뒤, 왕홀을 대장으로 하여 20만 대군으로 趙나라를 侵攻하여 도읍인 <한단>을 포위한다. 이에, 趙나라는 5個月 동안 버티다가 趙효성왕은 楚나라와 合縱을 맺기위하여 평원군을 단장으로하는 20명.. 史 記 2009.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