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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京城이라 불리던 시절의 서울 모습

동천 2013. 6. 21. 22:01

 

 京城이라 불리던 시절의 서울 모습★
남 산공원 야외 음악당
경 성 시가지 일부
 
京 城 東洋拓殖株式會社. 日帝가 1908년 12월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한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을지로 2가에 있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아서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7만8천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 한국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東拓의 소작료는 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
방법도 악랄하였으므로, 한국인들의 東拓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현 을지로쪽 명동 입구
 
덕 수궁 안에서 바라본 경성시가 일부  
경 성 太平通  
조 선은행 앞 대광장  
경 복궁 集玉薺  
이 건물은 현 충무로 입구 신세계백화점으로 1934년에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3,000여평의 건물로서 양식주의에서 근대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이다. 
경성 종로 2가 거리 
京城驛에 서 남대문 방향
동 대문밖 조선인 마을  
경 복궁 광화문 
경 성 동대문  
종 로 보신각 
  
경 성 東小門 (惠化門).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홍화(弘化)
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北門
(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경복궁 광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