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100년전 아름다운 고적들◈ 고적(古跡)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다. 은진미륵(恩津彌勒) 논산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미륵보살상. 보물 제218호. 머리 부분이 커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높이가 18.2m나 되는 고려시대 최대의 석불입상으로,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석불 앞에 보물 제232호인 석등이 보인다. ![]()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공주 공산성(公山城) 쌍수정(雙樹亭)에서 금강을 내려다본 풍경.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쌍수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대에 세워졌다는 정자다. ![]() 공주 진남루(鎭南樓) 공산성의 남문.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 대칭형태로 조성한 후, 두 석축기단에 걸쳐 누각을 세워 2층과 같은 효과를 냈다. ![]() 충주 충렬사(忠烈祠) 임경업어제비(林慶業御製碑) 충주 충렬사에 배향된 충민공(忠愍公)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정조의 어제비. 임경업은 조선 인조 때의 무장으로 친명반청(親明反淸) 활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여 고려 무신 최영(崔瑩)과 함께 무속신앙에서 가장 존숭받고 있다. ![]() 충주 약사(藥寺)의 약사전과 삼층석탑 약사는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단호사(丹湖寺)의 옛 이름.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되었다. 약사전 내에는 고려시대 철불좌상(보물 제512호)이 봉안되어 있다. 앞뜰의 3층석탑과 깊게 휜 소나무가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충주 관아 비석 조선시대 관아 근처에는 전임 수령을 기리는 비석이 많았다. 대개는 수령들의 치적과 무관하게 만들어지곤 했다고 한다.사진 전면의 ![]() 폭포 충주와 제천 사이의 어느 산속에 있는 폭포인 듯한데,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바위를 끼고 쏟아져내리는 물줄기가 용의 모습을 닮았다.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를 누렸을 법하다. ![]() 충주 육각당(六角亭) 연꽃이 만발한 연못 한가운데 있는 육각 정자가 운치를 자아낸다. 현재 육각정과 연못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충주교육청이 들어서 있다. ![]() 대구 거리 상점들이 즐비한 대구의 거리. 한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 대구 달성공원(達成公園) 달성은 본래 삼국시대의 성곽인데, 1906~07년에 성곽을 해체하고 도로를 만들어 공원으로 사용했다. 일본거류민단이 이곳에 신사(神社)를 세웠다고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것이 그 신사로 추정된다. ![]() 부산 일본인 거리 부산의 일본인 거리. 지게로 짐을 나르는 짐꾼은 한국인이다. ![]() 부산항 부산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로 개항장이 되었다. 일제는 1905년 전후 경부선 철도 개통과 관부연락선(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던 배) 취항, 부산항 축항(築港)공사 등 일련의 사업을 통해 부산을 한국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사진은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는 아미산에서 내려다 본 부산항. ![]() 부산 초량 부산 용두산 아래 초량은 숙종대부터 왜관(倭館)이 있던 곳. 개항 이후 이곳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 부산항 매립지 부산은 연안의 땅이 몹시 좁았기 때문에 새로운 땅을 만들기 위해 1902년 개펄 매립공사를 시작했다. 매립지에 부산역 부지가 만들어지고 부두지역이 확대되어 세관과 제1부두가 완성됐다. ![]() 부산항 잔교(棧橋) 1905년 관부연락선이 취항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일본인이 크게 증가했다. 이에 일제는 1906년 항만에 철도잔교를 놓아 통행을 도왔다가 1918년에 철거했다. 사진은 관부연락선에서 내려 잔교를 건너는 일본인들. ![]() 부산세관 부산이 무역항이 되면서 관세수입이 증가하자 1882년 해관(海關)이 설치되었다. 부산세관으로 이름이 바뀐 1906년 무렵 일본인들은 세관을 새로 지었다. 사진은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나르는 장면으로 보인다. ![]() 부산 일본군수비대 1895년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했지만, 이 무렵 한국군은 본래 있던 군진과 수영마저 폐지되고 진위대(鎭衛隊)도 파견되지 않았다. 일본군수비대는 송현산 북쪽 기슭에 병사를 짓고 주둔하다가 훗날 대신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 목포이사청과 우편국 목포는 1897년 개항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일본 기관들이 들어섰고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 군산 전경 1899년 개항한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항구였다. 미곡반출의 관문이었던 것. 사진에 한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 거류지임을 알 수 있다. ![]() 함흥 만세교(萬歲橋) 성천강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로, 군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조선 태조가 붙인 이름이라 한다. 1905년 러일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일본군이 1908년 다시 세웠으나, 1928년 대홍수로 유실되자 1930년 철근콘크리트로 건설했다. 명륜당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다. 당하기도 한 가슴 시린 고장이다. 주도(州都)가 되었다. 신의주와는 철교로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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