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측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열세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송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지린 성 지린으로 가서 유원
중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였고, 1926년 10월 17일(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27년 길림성 중국인 학교인 육문중학교에 다니다가
1929년 반일활동으로 중국 군벌 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 나와 국민부 산하의 청년 조직에서 일할 무렵(1929년에서 1931년 사이) 김일성으로 개명한다.
1930년 6월 30일 지린 성 창춘에서 카륜 회의를 하였다.
그의 무장 투쟁은 1937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작은 규모의 보천보 전투가 최고 성과로 여겨지며,
이 전투에서 일본인 7명 사망, 7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때때로 조선의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정치위원장이었던 위증민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던 데 비해 김일성의 현상금은 1만 엔으로 오르게 되었다.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25일 화룡현 홍기하에 있던 마에다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 습격에서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노획했으나, 북한에서는 그다지 조명 받지 못하는 사건이다.
또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으로
교조주의를 혹독히 비판하고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할 것을 제시했다.
다만, 1929년 길림 제5 중학교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조선혁명군
사건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서 복역하고 1930년 5월 초에 출옥했다.
당시 그는 이종락의 부하로 활약했으나 북조선에서는 부인한다.
실질적으로 김일성은 중국의 만주 지역 항일조직인 동북인민혁명군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1940년 소비에트 연방령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의
대위가 되어 5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조직이 얼마나 독립적이었는가는 논란의 대상이다.
1945년 독일이 패배하고 일본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조선공작단에서 정치군사 책임자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광복 시기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
가 열렸고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김일성은 해방 후의 한국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의한 북조선 수탈과 김일성의 협조
1945 년 일본의 항복뒤 소련군은 북조선에 진주하였는데,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였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 방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북한여성의 대한 폭력, 상인들에 대한 수탈을 수차례 저질렀으며,
이는 북조선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양호단 과 같은 자위 단체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련군은 일본과 치른 전쟁에 대한 배상에 일환으로,
북조선의 수력 발전소 시설, 공장시설, 그리고 북조선 쌀 농사의 1/4 를 공출하는등 심각한 경제
수탈을 저질렀으며, 이에대한 결과로 북조선에서 수만명의 탈북자가 남한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소련의 수탈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공화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시기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수상이 되고,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내용은 남녀평등과 선거권 실시, 무상교육제도(북조선에서는 11년 무상교육제를 뜻한다.)
실시와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 실시, 자원의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남북 조선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공식적인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기 이전에, 북조선에 이미 노동당을 통한
사실상의 일당 정권을 수립하였고, 조선 철도경비대등의 창건을 통해 군사적인 기반도 마련한 상태였다.
이는 이 시기까지 혼란에 휩싸였던 남한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여러 정치적 세력과 정당의 공존을 수용하였던 남한과는 달리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기반으로한
북반부 단독정부 수립이 사실상 남한의 정부 수립 훨씬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9년에 독립 운동가 김구, 김규식 등을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고 4김회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김구, 김규식 등의 주장과 북조선의 단독 정부를
세우자는 김일성의 주장이 서로 달라서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다.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