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18~30세까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강제 입대시켰고. 전황의 급해지자 배속 장교들이 전황을 알리면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학생들이 전선으로 나가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學徒兵 지원 권유에 감동하여 대구나 부산 등 대도시에 피란 온 학생과
이렇게 하여 모집된 학도병은 "훈련이라곤 3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수성구에 있는 대구농림학교로 이동해 단발 장전식인 9·9식 일제 소총을 지급받았고 다시 3일 후 사단에 배속, 곧바로 戰線인 안동에 투입되어 M1 소총이 지급되었다. 훈련받을 때와는 다른 총이라 탄약을 장전할 때 많은 학생들이 손을 다쳤다. ▶학도의용군으로서 전사단 예하 부대에 배치 용전분투
또 여학생들도 간호원 등으로 상당수가 참가하여 싸웠다. 7월 중순,부산에서 700여명의 [학도의용대]가 UN군에 편입, 일본으로 가서 특수훈련을 받고 일부는 공수부대원으로, 일부는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에 정규 부대원으로 참전, 국군 병력 부족을 대신해 주었으며. 당시 국군 10개사단과 그 예하부대는 학도의용군이 참전하지 않은 부대가 없었고 그들은 洛東江,多富洞,安東,杞溪,安江,永川,浦項,昌寧 等 최후의 橋頭堡에서 군번도 계급도 없이 白衣從軍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것이다. ▶學徒基幹隊와 遊擊隊 8월 초,대구에서 육군본부 정훈감실 소속으로 조직된 [학도 기간대]는 1,500명을 규합, 적의 후방에 침투하여 유격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밀양에서 창설된 유격대에 편입되었는데 ☞제1대대는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과 병행 양동작전으로 "장사동상륙작전"에 투입되었고 ☞제2,3,5대대는 10월 초순부터 패주하던 적이 태백산,설악산 등지에 割據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을 때 이를 소탕했고, 12월부터 서남지구 殘匪 소탕에 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학도호국단 총본부와 종군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10월 중순경, 서울에서 [전국 호국학병 추진위원회 총본부]를 구성, 국방부 정훈국과 육군본부 인사국의 협조를 얻어 약 3,000명의 애국 학도를 규합, 일부는 각 전투부대에 편입되고, 약 2,000여명은 1.4후퇴 때 부산 제2훈련소를 거쳐 포병,통신병과부대에 편입되었으며 인천지역 학생들도 이와 보조를 같이하여 약 1,000명이 규합, 자체적으로 연대를 편성,도보로 대전까지 이동하여 현지 입대하여 전투부대에 편입하였다. ▶ 湖南地區 殘匪 掃蕩戰
▶ 政訓工作과 學徒
대부분 학도들로 편성,선무공작 임무 수행 ▶ 以北學徒의 從軍
자율적으로 호국단, 학도 의용대, 대한 정년단,학생부 등을 조직하여 군 작전 수행을 위한 지원을 하다가 1.4후퇴 때 집단적으로 남하, 군 입대하거나 학도의용군으로 종군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