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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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
삼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 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글 속의 “어머니”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가 되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 동덕여대 아동학과 교수 우남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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