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말/祭 禮

1.제사에 대한 칼럼 요약

동천 2013. 2. 12. 15:30

 

 

제사에 대한 칼럼 요약

제사는
그냥 넘어가면 양속이고,
따지면 불화다.

조상의 제사를 위하여
많은 음식, 투여한 노동,
친인척의 출석에따른 가정과
사회적 비용그리고 총총히 흩어진 뒤의 허망함은 도대체 뭐지?

하여,
제례를 창안한 조선 유교의 비밀을 기어이 밝혀냈으니,
그것은 통치 이데올로기의 실행 방식이었다.

성리학을 개국이념으로 택한 조선의 건국 세력은 불교 탄압과 함께 민간의 주술신앙과 음사(淫祀)를 엄격히 금지했다.

소격서를 세워 무당과 무격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상과 하늘을 들어앉혔다.
그리하여 조상에 제례(祭禮)를 행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祭天)이 그것이다.

경복궁 좌측에
종묘를 지어 조상숭배의 기초를 마련하고,
경복궁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곡식신과 토지신에 길운, 풍년을 빌었다.

조선법전인 『경국대전』에
제사 규칙을 정해 반포했다.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봉사,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먹을 게 없던 시절,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했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랐다.

그런데 가문과 문벌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조선 후기
봉제사는 문중 대사, 가족의 최대 행사로 변질됐다.

1년 20회 정도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신분 향상을
열망했던 서민들도 제례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몇 년 전, 필자는 연구결과를 조심스럽게 발표했다.

유교가 종교 기능을 벌써 상실했고,
한말(韓末)을 기준으로 친가, 외가, 처가에 벼슬한 사람이
없는 한족(寒族) 서민이 분명하므로 이제 제사는 무용하다는 주장을 폈다.

조선이 역사에 묻힌 마당에
통치수단인 제례의 의미는 소멸됐음을 부가했다.

주자학 선조 안향 선생을 배향한 소수서원에서
반경 백리 안에서 사셨던 어르신들 말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조상도 모르는 놈들!”라고 말한다.


안동 태생의 70대, 명문대 출신 공무원이었다고 밝힌
노신사의 질문은 이랬다.

“사실 나도 제사를 고민 중인데,
송 교수가 주장한 논리의 역사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아주 소상하게 기획연구의 경로를 말했고,

‘예법에 사로잡힌 제례’의 폐지를 주장했다.
온갖 제물을 폐하는 대신
밥, 국, 북어포, 냉수에 술 한잔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음-.” 저쪽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요량으로 나는 부가 설명에 들어갔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는 간소화를 주장해
네발짐승의 고기를 금하고, 국, 밥, 나물 정도만 권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아예 청수(淸水)만 올리도록 했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을 중시했다는 점을 말이다.

조금 뜸을 들인 뒤 그가 투항했다.
“나도 그렇게 할랍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 칼럼요약(2013,2,12 중앙일보27면)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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