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戰爭秘史

한국전쟁

동천 2016. 1. 29. 08:00

http://tvpot.daum.net/v/zko2tbCJ7pA%24




1950년 그때의 모습

 

1950. 8. 8. 다리밑의 피난민의 임시 거처?. 복중의 더위를 피하기엔 그만이기도

 

1950. 8. 북한군 소년병이 포로로 잡혀 미군의 취조에 응하고 있다.

비단(非但) 북한군만 소년병이 있었던게 아니다. 소년병은 많이 알려진 학도병과 달리 17세 미만 학생들이
군대에 징집된 경우인데, 군사편찬연구소는 국방부로 부터 의뢰 받아 2011년 11월 ‘소년병’ 연구를 펴냈다.
6.25 전쟁에 미성년자인 소년 소녀들이 2만 9603명(소녀병 467명 포함)이나 병사로 참전했다는 이야기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번을 부여받은 정규군으로서 전후방에서 일정 기간동안 복무하다 제대한 소년병인데
물론 대한민국 만 놓고 봤을 때 그렇고,
미성년자의 징집을 금지하는 국제법 위반인 만큼 정부는 지금까지

소년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서야 소년병 실체와 규모를 인정하고 전사자 2천500여 명의

신원을 확인했다고...현재 생존해 있는 소년병은 7천500여 명, 그러나 국가유공자 예우를 하지않아 국회의

처리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라는..국가의 녹을 받는 나리님네들 자기네들 밥그릇 챙기기만 하지 마시기를..

한국군 소년병. YTN 화면캡처 뉴스보기 http://www.ytn.co.kr/_ln/0115_201206211637011774


1950. 8. 경북 다부동지역의 방어진지

1950. 8 다부동 전투의 미군 셔먼전차와 병사.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에서 있었던 국군 제1사단, 미 제1기갑사단의 방어전투.

적의 총공세에 밀려 후퇴한 국국은 대구 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의 대구북방의 다부동의 낙동강
방어선에 포진하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적에 수중에 들어 간다면 대구가 북한군 화력의 사정권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 여부가 결정될 수 도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군은 1950년 8월 초부터 임시 수도 부산대구
로 통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왜관 북쪽에서 낙동강을 넘어온 인민군 1사단, 13사단, 45사단의
3개 사단은 증강 된 병력과
소련제 T-34 탱크 34대, 각종 공용화기 670문의 화력을 투입하여
대구
축선에 집중시켜 공격했다.

이에 반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받은 학도병 500여 명과, 7천 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북한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 하는데 우리군이 크게 기여 했다.

그 다부동 지역을 미 제1기병 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적의 9월 공세 밀렸던 미 제1기병사단은 한국군이 제1사단

이 사수했던 다부동 일대의 주저항선을 적에게 붕괴 당했으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개시된 낙동강방어선 총반격으로
탈환한 전투이며 한국전쟁사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아쉬운건 6.25 당시 미 종군기자에 의해 기록된 미군에 관한 사진은 많으나 우리 국군과 관련한 사진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1950. 8. 초 다부동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탱크.

다부동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탱크 사진출처 : LIFE지

1950. 8 다부동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탱크

1950. 8 다부동 전투의 북한군 T-34 탱크의 파열된 포신과 탑부분도 파괴된 모습이다.

미군이 탱크에 글을 쓰다만 페인트 통이 놓여있다. (앞 전 게시물을 보셨다면 페인트 글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1950. 8 다부동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탱크를 미군 셔먼탱크 를 몰고온 병사들이 살피고있다.

1950. 8. 다부동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탱크 앞에 미군 탱크가 진격로를 확보하고 있다.

1950. 8. 다부동 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탱크 사이를 미군 셔먼탱크가 지나고 있다.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1950. 8. 10. 핫 바지를 인솔하는 미 해병대.

1950. 8. 11. 그해 여름 피난민들의 움막.

1950. 8. 12. 북한군 포로.

1950. 8. 13. 안동의 낙동강 전선.
한국군의 공격을 받은 후 북한군의 탱크 운전병이 부서진 탱크와 함께 죽어있다.
무서울것 없이 진격하던 소련제탱크도 강력한 한국군의 낙동강 전선 반격에 차츰 파괴되어 갔다.


1950. 8. 미군의 공격을 받아 화염이 피어오르는 북한군 탱크

1950. 대구 부근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 탱크.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 동안에 병기(LMG기관총)손질을 하고 있다.

양각대가 있는 견착식 LMG-A6 기관총

1950. 8. 13. 국군이 81mm (박격포) 조포 훈련을 하고 있다. (당시는 포열이 나선형이 아닌 박격포네요)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 나갔다.

1950. 8. 16. 적의 집결지에 B-29 폭격기의 폭탄 투하
북한이 낙동강 전선의 총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한 후 B-29 폭격기 98대가 북한군이 집결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총 850톤의 재래식 폭탄을 집중 투하 하고 있다.

B-29의 폭격후 화염이 피어 오르고 있다.

B-26 경폭격기는 야간폭격 전담.

1950. 8. 포항부근의 한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1950. 8.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1950. 8 경남 영산부근에서 파괴된 북한군 제 16 기계화 여단 소속 T-34탱크를 살피고 있는 미 해병들.

영산전투(靈山戰鬪) :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 연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 미 24사단과 그
증원부대가 영산지역에서 북괴군 제 4사단의 공격을 격퇴한 방어전투를 말함. (1950. 8. 5 ~8. 19 까지) 네이버백과

1950. 8 경남 영산전투에서 파괴된 북한군 T-34탱크를 살피고 있는 미 해병들.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1950. 8. 24. 인민군 포로가 미군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
인민군 소년병으로 보이는앳된 모습이다. 여성은 통역자 라고 한다.

1950. 8. 24. 임시포로수용소. 북한 인민군 포로들이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1950. 8. 24 피난민 행렬.

1950년 피난민 촌

1950. 부산 국제시장, 전쟁통에 북적이는 피난민들.


1950. 8. 25. 길가에 널브러진 피난민 시신들의 처참한 모습.

1950. 8. 28 포로수용소 안의 14세 북한군 포로. AP통신

1950. 9. 9. 경북 영덕의 강구항을 포격하는 모습. 이후 미 함대는 다음 작전을 위해 원산 앞바다로 이동..

1951. 9. 11. 경기도 동두천, 군인들의 통제아래 피난민들이 이동하고 있는 모습.

1950. 9.12 부산항, 미 해병대, 한국 해병대, 제 17여단이 배에 오르고 있다.

1950. 9. 인천상륙에 앞서 공군의 전투기와 해군의 집중적인 지원사격이 있었다.

1950. 9. 13. 인천상륙작전 감행 이틀전에 월미도에 포격을 가하고 있다.

1950. 9. 15 인천의 월미도로 향하고있는 상륙정들 공중 촬영.

1950. 9. 15. 월미도로 상륙하는 해병대.

1950. 9. 15. 선발대의 인천상륙 후 공병 및 군수장비를 LST함으로 부터 내리고 있다.

1950. 9. 15.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기함 마운트 맥킨리(USS Mount Mckinley)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승선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 한 USS Mount Mckinley 호

북미에서 가장높은 알래스카에 있는 맥킨리 산(해발 6,194m)의 이름을 따서 붙인 수륙양용 부대의 기함으로
제작되어

수륙양용 부대 사령관이 승선하여 사령탑으로 최신 무선시설을 탑재하여 대규모 작전용으로 활약 하였다.

상륙작전 성공에 환한 미소를 짓는 맥아더와 참모들

1950. 9. 16. 인천을 상륙하는 맥아더 사령관.


1950. 9. 16. 인천해를 완전히 확보하게 되자 맥아더는 인천에 첫발을 내딧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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