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2)
"양심이 일어났는데 그게 어째서 반역이던가" 달성 가창에 74년만에 건립된 10월항쟁 추모시설
- 정우태
- 입력 2021-08-16 17:26 | 수정 2021-08-17 16:2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 위치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정우태기자wtae@yeongnam.com |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교에서 가창호 방면으로 향하는 샛길이 있다. 비포장 길이다. 이 길을 따라 300m 남짓 걸어가면 먼저 위령탑이 보인다. 뜻밖의 장소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위령탑을 중심으로 양 옆에는 추모비가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희생자 155명, 10월 항쟁 유족회가 정리한 희생자 573명 등 총 72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변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위령탑 뒷편에는 10월 항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한 켠에 통일운동가 고(故)백기완 선생의 글도 마련돼 있다.
"민중의 목숨 절로 일어났는데 그게 어째서 죄악이던가… 양심이 일어났는데 그게 어째서 반역이던가."
추모시설은 지난 2020년 11월 건립됐다. '10월 항쟁'이 있은 지 74년만이다. '10월 항쟁'은 1946년 발생했다.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나라를 되찾은 지 불과 1년만이다. 도대체 1946년 10월 대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무장한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
◆ 1946년 10월 1일의 '함성'
1946년 10월 1일 오전 10시쯤 당시 대구부청(현 대구시의회) 앞에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1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기아·빈민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경찰의 무력진압에 맞선 시위대는 경북도청으로 이동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같은 날 대구역 광장에서는 철도 노동자 총파업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노동자 시위대는 태평네거리 방향으로 행진했다. 도보로 20분 내외 거리를 두고 동시에 벌어진 시위의 규모는 점차 커졌고, 경찰은 대치 중이던 민간인에게 총을 발포했다.
10월 항쟁 주요 사건 및 전개 과정. 10월항쟁유족회 제공 |
미 24군단 사령부 감찰참모실이 작성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 오후 5시 기준 모인 시위대 규모는 3천~4천 명으로 추산되며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포가 있었다. 사격은 밤 11시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발포 이유와 경위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음날(2일)에는 청년·학생 중심의 시위가 일어났다. 대구의대 학생과 교원 150여 명은 전날 숨을 거둔 20대 노동자 김용태의 시신을 앞세워 행진했다. 대구사범대, 중앙파출소, 경북도청 등을 거쳐 목적지인 대구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시위대에는 대구사범대 학생들과 중학생들도 합세했다. 경찰은 일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대화에 나섰다.
하지만 시내 곳곳에서 봉기가 발생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미군은 오후 5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 일부 시민들이 파업을 지속하며 저항했으나, 8일 노동자들이 직장으로 복귀하면서 '대구 항쟁'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경북 칠곡, 영천 등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했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집결한 군중들 모습.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 |
◆ 이념의 시대, 보듬지 못한 아픔
10월 항쟁의 원인은 복합적이었고 참여 계층도 다양했다. 발단은 식량난이었다. 미 군정의 미곡 수집 및 배급정책이 실패하면서 굶주리는 시민들이 늘었다. 특히 대구·경북의 경우 해방 직후 만주 등에서 귀국한 인구가 적지 않아 식량난은 심화된 상태였다.
9월부터 전국적으로 진행된 노동자 파업도 10월 항쟁의 배경이 됐다. 노동자 집회는 일반 시민들과 연대하면서 시위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또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가 나오면서 대학생, 청년들이 집회에 앞장섰다. 학계에서는 노동자와 시민이 중심이 된 해방 이후 첫 민중운동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1차 조사 결과를 보면, 10월 1~2일 이틀동안 대구에서 6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직업 분포를 보면 농업 종사자가 45명(75%)으로 가장 많았고, 노동자·자영업자·공무원·학자·학생 등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다. 연령별로는 20대가 20명(33.3%)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30대(19명·31.7%), 40대 이상(13명·21.7%)이 뒤를 이었다. 또 10대 미성년자 8명(13.3%)이 당시 목숨을 잃었다.
10월 항쟁에 대한 시각차가 유족들을 괴롭혔다. 파업과 민중 봉기에 당시 진보 세력의 영향이 작용했다는 점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이념 대립으로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진상 규명은 미뤄졌고 유가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반공이 국시'인 시대를 살았던 유족들은 국가 권력에 소중한 가족을 잃고도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드러낼 수 없었다.
'10월 항쟁'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도 불과 5년 전이다. 지난 2016년 대구시가 '대구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마련한 것이다. 이전에는 주로 '대구 10월 사건', '대구 10·1 사건' 등으로 불렸다. 일각에서는 폭동, 소요사태 등 부정적인 단어가 쓰이기도 했다.
채영희 10월 항쟁 유족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평생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를 새긴 채 힘겹게 자식을 키우셨다. 연좌제로 낙인이 찍히면 취업도 못하는 시대였다"며 "억울한 죽음이 많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슬픔과 아픔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다.
대구근현대역사관 내 전시물 일부. 1946년 10월 항쟁에 대한 기록은 연표에 적힌 '10월 항쟁 발발'이 전부다. 정우태기자wtae@yeongnam.com |
◆ "역사의 아픔을 숨기는 게 대구의 본 모습은 아니다."
잊혀진 대구 10월 항쟁의 역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2007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대구 10월 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국가기관 및 미 군정 기록 외에도 유족과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 등 참고인 100여 명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섰다.
2010년 3월 진실화해위원회는 10월 항쟁을 진실로 규명했다. 국가기관이 사건의 실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항쟁의 상세한 전개 과정과 배경, 영향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또한 조사 기간 중 피해 신청을 하지 못한 유족도 적지 않다.
10월 항쟁유족회는 '누락'된 피해자들을 포용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1기가 해산한 뒤 10년 동안 진상규명,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올해 5월 진실화해위원회 2기가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10월 항쟁에 대한 조사도 재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제는 아픈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드러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0월 항쟁의 비극을 주제로 한 시집 '천둥의 뿌리'를 펴낸 이하석 시인(대구문학관 관장)은 "경험을 드러내고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진정한 치유를 할 수 있다. 역사의 아픔을 숨기고 외면하는 것이 대구의 본모습은 아니다. 죽음을 기록하고 재해석하고 또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또 "기억이 유실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흩어진 기록과 유족들의 증언 등 자료를 모으는 작업도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문주 영남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역사는 '현재화'할 때 의미가 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그동안 이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아픈 역사를 통해 국가 권력에 의한 민간인의 희생되는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사유할 수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고 강조했다.
정우태기자 wtae@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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