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戰 禍 1
한편, 형극(荊棘)의 수난은 시민의 몫이었다. 26일 '반역자들을 처단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은 방송을 탔으며, 7월 1일 박헌영은 "반역자들을 체포, 처단하여 인민들의 원한을 풀어 주라"고 선동했다. 9월 28일 서울을 되찾기까지 석 달 동안 '반동분자'로 지목된 이들은 거리 한복판에서 자행된 '인민재판'의 희생양이 되거나 방방곡곡에서 학살되었다. 정부가 확인한 통계만도 최소 6만여명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제헌국회 의원 200명 중 50명, 2대 국회의원 210명 중 27명, 249명의 언론인 등 10만여명의 납북 인사들이 창자를 끊어내는 단장(斷腸)의 아픔 속에 북으로 끌려갔다. 평양형무소 벽에 "자유여 그대는 불사조/ 우리는 조국의 강산을 뒤에 두고/ 홍염만장(紅焰萬丈) 철의 장막 속/ 죽음의 지옥으로 끌려가노라/ 조국이여 유엔이여/ 지옥으로 가는 우리를/ 구출하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다"라는 믿음을 새기며 구원의 그날을 기다린 이름 모를 이의 염원에 국가도 유엔도 답하지 않았다. 납북의 참극(慘劇)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仁川上陸作戰의 成功과 洛東江線에서의 總反擊으로 서울을 向하여 進擊해 오자 北傀는 서울 유지가 困難하다고 생각되었을 무렵부터 焦土化戰術을 구사하게 된다.
人民軍은 敗戰으로 후퇴하면서 장차 南韓을 再侵하기 위하여 대들보를 빼놓아야 할 必要性이 있고, U N 軍의 폭격으로 황폐화된 北韓地域 再建에 많은 人材가 필요하다는 判斷下에서
南韓內의 反共鬪士,有能한 人材,施設, 物資 等이 남아있게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인적자원은 숙청하고, 물적자원의 완전파괴하는 焦土化戰術을 쓰게 된다.
이리하여 서울에서만 20,500名의 死傷者가 있었고, 납북된 인사는 전쟁 기간중 總 83,000 餘名 中 이 時期에 國會議員과 政黨 幹部인 김약수 國會副議長, 조소앙 社會黨 黨首, 김효석 內務長官 等 48 名 이었고,
法官,新聞記者,宗敎人,科學者,文人, 治安隊 幹部 等 2 萬~3 萬名이 철사줄에 두손이 묶인 채 미아리 고개를 넘어 以北으로 끌려갔으니, <단장의 미아리고개>가요가 탄생한 것도 이러한 사연 때문이다.
特히 南韓 醫士의 2/3 와 建設 關係 技術者 等 소위 말하는 "士"字 붙은 技術 人力은 모조리 납북해 감으로써, 서울 수복 後,醫療,防疫問題에 莫大한 지장을 초래하였고, 서울에는 한 사람의 미장공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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