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中朝義勇軍總司令官 彭德懷
한편, 중공군은 한국전에 불법 개입한 이래 連戰連勝하면서 38도선 부근까지 남하하여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방 여러 나라들이 UN에 제출한 ▶ 현상에서의 즉시 휴전 ▶ 휴전 간 한국문제의 政治的補決을 시도한다. ▶ 외국군은 적당한 단계를 거쳐 撤退한다 ▶ 대만 문제와 중공의 UN 가입 문제는 美`英`中`蘇의 四大國이 협의 한다는 UN측의 제의를 일축하고 정치적 완승을 강구하려 했다.
그도 그를 것이 中朝義勇軍總司令官 彭德懷가 毛澤東에게 보내고 毛澤東이 스탈린에게 회송한 전투상황보고 요지는
《 적은 포위되어 결정적인 측면공격에 의하여 섬멸될 것이다》라는 것이었고
1월 시점에서는 분명히 한반도 전체를 병탐하려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중공은 정전하는데 가장 좋은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말았으며 1951년 1월 17일에 접수된 중공의 회답은 무조건 항복하라는 지나친 요구는 오히려 미국을 격노하게 만들었고 미국은 끝까지 싸울 결의를 굳히고 군사력에 의해서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최대한 저항을 반복한다는 새로운 결의를 하기에 이르게 되어 우리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 완승을 의심하지 않던 중공군의 군사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1.2월 공세에서 38도선의 남쪽 50~100km까지 진출한 중공군은 공세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당시의 중공의 국력으로는 압록강에서 460km나 떨어진 37도선 부근에서 다시 공세를 전개한다는 것은 매서운 추위와 UN군의 제공권 하에서 人力과 畜力에 의지한 병참만으로는 뒤따를 수 없었으며 人海戰術만으로 미국의 과학기술의 장벽을 깨뜨릴 수 없었다.
결국 중공측도 수십만의 인명이 희생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난 뒤에야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쌍방은 휴전을 희구하는 정책에 일치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東 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