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漢山城

42.병자호란

동천 2016. 6. 17. 23:27

임진왜란으로 우리나라와 명나라가 왜군과 싸우고 있을 때 만주에서는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추장(酋長) '누루하치'가 나타나 팔기(八旗)의 강병(强兵)으로 여진(女眞)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광해군 8년에는 국호(國號)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만주의 태반을 그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북쪽에서 여진족(女眞族) 즉 만주족(滿洲族)이 세력을 떨치자 우리로서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고 명나라도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위협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년 전에 '누루하치'가 인근의 부족을 정복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직후부터 성곽의 수축과 축성 사업은 비단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는 데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만주족의 대두에 대비하기 위한 데도 있었다.
더욱이 후금이 건국되고 나서는 우리로서 그들에 대한 대비책이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도성의 수축과 기타 지역의 축성론(築城論)이 크게 대두하게 되었으나,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것은 도성보다도 그 외진(外鎭)인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화성(江華城)에 대한 것이 더 큰 것으로 등장되었다. 앞서 선조 28년(1595) 12월에 광주인(廣州人) 권응원(權應元)에게 실직(實職)을 주어 남한산성을 수리하게 하고 적속둔병(積粟屯兵)의 일을 맡게 한 일이 있더니, 인조 2년(1624) 3월에는 왕이 삼정승(三政丞)과 비변사(備邊司)의 제신(諸臣)을 인견(人見)하고 남한산성과 강화성의 수축을 논의하였으며, 그 결과 먼저 강화성을 수축하고 이듬해에는 남한산성을 수축하기로 결정하였다.이러한 결정은 이괄(李适)의 난(亂)이 있은 직후에 있었던 것이니만큼 그것으로부터 받은 충격도 컸을 것이 짐작되나, 궁극의 목적은 만주족(滿洲族)에 대한 대비책에 있었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결정으로 강화성과 뒤이어 남한산성의 수축이 착수된 것 같다. 그것은 인조 3년(1625) 2월에 호조(戶曹)에서 남한산성 부역(赴役)의 승군(僧軍)을 감하여 그 일부를 단천(端川)에 보내어 은연(銀鉛)을 채취케 할 것을 청하였고 또, 그해 6월에는 완풍군(完豊君) 이서(李曙)의 건의로 남한산성에 행궁(行宮)을 짓게 하였으니, 이러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그것이 짐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조 2년 경부터 강화성과 남한산성의 수축이 착수되어 그 성과는 어느 정도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청나라의 동태가 미묘하여지자 남한산성의 수비책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되었다. 즉, 인조 14년(1636) 7월에 남한산성수비사(南漢山城守備使) 이시백(李時白)의 건의로 남한산성의 입방군(入防軍)을 12,700명으로 하고 경기도 소속의 군은 그 해당의 수령(守令)과 장관(將官)을 남한산성으로 불러들여 그 신지(信地)를 획정(劃定)하는 한편, 원주(原州) · 안동(安東) · 대구(大邱)에 각각 종사관(從事官)을 보내어 그 군을 사열케 하여 형세에 따라 남한산성에 동원되도록 조치를 취하게 하였던 것이다.이러한 만주족 침입에 대비하는 성곽의 수축과 축성 사업은 비단 도성과 그 외진 뿐만 아니라, 지방성(地方城)에 있어서도 상당한 추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강화성과 남한산성의 수축과 때를 같이하여 인조 2년 11월에는 평양성(平壤城)의 수축을 끝내고 별조도감(別造都監)과 군기소(軍器所)에서 만든 대포 수십구를 평양성에 보내어 배치케 한 사실로도 알 수 있으나, 이러한 지방성의 수축은 비단 평양성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상당수에 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후금과의 관계가 미묘하여지자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서울과 그 주변 그리고 지방성의 수축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책에도 불구하고 청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청군(淸軍)은 드디어 인조 14년(1636) 12월 9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남하하여 그 선봉은 벌써 12월 15일에 남한산성에 이르고, 그 대신(大臣) 담태(譚泰)의 군은 아무런 저항없이 서울에 입성하여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에 이르렀으며, 청 태종은 이듬해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 이르러 군 20만을 집결시키고 산성 동쪽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산성 안을 내려보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앞서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하여지자 인조 14년 12월 14일에 판윤(判尹)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 부제학(副提學)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고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으로 하여금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게 하여 강화(江華)를 지키게 하는 한편,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을 시켜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와 원손(元孫) 그리고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平大君)을 안내하여 먼저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리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서울을 지키게 하고 인조는 그날 밤에 강화로 떠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인조는 14일 밤에 궁궐을 나서 숭례문(崇禮門)까지 나왔으나 그 때 청군의 선봉은 벌써 홍제원(弘濟院)에 이르고 그 일부는 양천(陽川)으로 나가 한강을 차단하고 양철평(良鐵平, 마포 건너쪽 정천평(貞川坪)?)에 진을 쳐 강화로 가는 통로를 막았다. 거기에 인조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세자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수구문(水口門)으로 나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조가 도성을 떠나자 도민(都民)들은 앞을 다투어 피난길을 떠나는 바람에 부자, 형제, 부부가 서로 짝을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는 것이다.[[註24]



이렇게 14일 밤에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는 영의정 김류(金**) 등의 '남한산성은 고성(孤城)으로서 외부로부터 원조가 어렵고 또 병량(兵糧)과 마초(馬草)의 준비가 부족하여 성을 보존하기가 어렵다'라는 주장으로, 다음날인 15일 아침에 산성을 떠나 강화로 가다가 얼음이 덮이어 더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조는 훈련대장(訓練大將) 신경진(申景色) · 총융사(摠戎使) 구굉(具宏) · 어영대장(御營大將) 이서(李曙) ·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 · 어영부사(御營副師) 원두표(元斗杓) 등으로 하여금 1만 3천의 군대로서 성첩(城堞)을 지키게 하고,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 · 부원수(副元帥) 신경원(申景瑗) 그리고 제도(諸道)의 관찰사(觀察使)와 병사(兵使)에게는 근왕(勤王)의 군사를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그 때 남한산성의 형세로는 관향사(管餉使) 나만갑(羅萬甲)의 보고에 따르면 미(米) · 두(豆)가 함께 18,000석(石), 피곡(皮穀)이 5,800여석으로 그것은 산성 안의 인원이 50일간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되는 것이며 또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신국(金藎國)의 보고에 따르면 군사의 수가 14,000에 가깝고 재신(宰臣) 이상이 70명, 당상관(堂上官) 이상이 50여명, 당하관(堂下官) 이하가 270명이 되었다는 것이다.[[註25] 이렇게 청군의 포위로 고립된 남한산성은 날이 갈수록 고난을 더하여 갔다. 안으로는 병력 · 장비 · 식량 등 인적 · 물적 부족에다가 혹한이 몰아닥쳐 그 참상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밖으로는 각지에서 원군(援軍)이 남한산성으로 몰려들었으나 청군에게 모두 패배를 당하여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도 그들의 국내 사정이 심상치 않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서 산성 안에서는 차츰 강화론(講和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으나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상헌(金尙憲) · 이조참판(吏曹參判) 정온(鄭蘊) 등은 이를 반대하고 주전론(主戰論)을 폈다. 그러나 주전파(主戰派)에 별로 신통한 방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인조는 좌의정(左議政) 홍서봉(洪瑞鳳) ·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영(淸營)에 보내어 강화를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청 태종은 인조가 친히 산성에 내려와서 항복할 것과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의 맹약을 저버린 주모자 2, 3명을 보내라는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치욕적인 요구에 대하여 우리로서 아무리 전세가 불리하다 하더라도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월 22일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그 곳에 피난갔던 빈궁과 왕자 이하 200여명이 청군에게 잡히어 남한산성 밑으로 호송되어 왔다. 그 때 강화의 수비군은 지리상의 유리한 점만을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하다가 급습한 청군에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검찰사 김경징 · 부사 이민구 · 강화유수 장신 등은 배를 타고 도망치고 전우의정 김상용 · 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등은 스스로 불질러 자살하였으며 많은 부녀자들이 순절하였다.



이러한 강화(江華) 함락의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더 항전할 용기를 잃고 강화(講和)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전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홍서봉(洪瑞鳳) · 최명길(崔鳴吉) · 김신국 등을 청영에 보내게 되고 한편 청사(淸使) 용골대(龍骨大) · 마부태(馬夫太) 등이 산성에 오게 되어 마침내 강화조건에 합의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결정된 중요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청에 대하여 군신(君臣)의 예를 행할 것 ② 조선왕의 장자(長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제2자(봉림대군), 제대신의 자를 심양(瀋陽)에 보내어 인질로 할 것 ③ 조선은 신구(新舊)의 성원(城垣)을 선축(繕築)치 말 것 등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이러한 조건은 이보다 더 큰 치욕이 없었으나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도리가 없었고, 인조는 청의 강요에 마침내 세자를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성하지맹(城下之盟)을 행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그날로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1월 30일로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지 46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한편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고 나서 척화론(斥和論)의 주동자 홍익한(洪翼漢) · 오달제(吳達濟) · 윤집(尹集) 등을 잡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우리는 일찍이 보기 드문 국난과 치욕을 당하였으나, 그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서울 도성의 형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조는 도성을 떠나기 전에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케 하였다. 청군이 서울 근교 홍제원에 이른 것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떠나던 12월 14일이었다. 자칫하면 인조가 도성을 떠나기 전에 사로잡힐 우려마저 있었다. 이조판서 최명길 등이 홍제원의 청진(淸陣)에 가서 주육(酒肉)으로 그들 군사를 위로하고 출병(出兵)의 이유를 묻는 등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에 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지 2일만인 12월 16일에 벌써 청군의 선봉은 남한산성에 다달았고, 청 담태의 군대가 서울에 입성한 것도 그 사이의 일이었다.



그것은 어떻든 유도대장 심기원은 청군을 맞이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성을 버리고 광릉(光陵)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도성을 쉽게 청군에게 넘겨준 것은 심기원의 탓이라기보다도 남한산성 수비에 편중한 것이 더 큰 원인이라 하겠다. 도성 소홀은 심기원의 보고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즉 심기원이 납서(蠟書)를 남한산성에 보내어 도성의 전황(戰況)을 '우리의 수비군은 270명에 불과하고 청군은 약 5, 6백명이 되나, 그들에게 화공(火攻)을 가하여 승리를 하였다'라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의 내용으로 보면 피차간 도성에는 치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로서 도성의 수비가 극히 소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심기원이 허황되고 과장된 전과(戰果)의 보고를 하여 상하(上下)로 하여금 놀라움과 분개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즉, 심기원이 초관(哨官) 이신민(李信民)을 시켜서 보내온 장계(狀啓) 가운데 도성 수비의 전과를 과장하여 조정(朝廷)을 기만하는 기미가 있어 보는 사람이 놀라움과 분개를 금치 못하였다는 것이며[[註28] 앞의 심기원의 납서 보고 가운데에도 전과를 과장한 것이 많았으나, 산성에서는 그 전과에 위안을 얻어 사기가 크게 떨쳤다는 것이다. 요컨대 병자호란 때도 임진왜란 때와 같이 도성이 한 때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점령될 때나 수복할 때 모두 심한 전투는 없었다. 그리고 청군의 도성 점령은 그 기간이 짧았고 그 병력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때는 임진왜란 때에 비하여 도성이 입은 피해는 작은 것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兩亂)을 통하여 도성이 입은 피해는 상당히 큰 것이었으리라는 것이 짐작된다. 그 중에서 보아온 것과 같이 임진왜란 때 입은 피해는 그 난후에 상당한 복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 때 입은 피해는 병자호란의 화약(和約) 즉 정축조약(丁丑條約)으로 인하여 도성의 수축은 물론, 다른 성곽에 대하여도 수축을 할 수 없게 되어 상당한 기간 그 황폐를 방치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정축조약에 의해 조선은 신구를 막론하고 성원의 신축과 수축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 이전까지에는 성곽의 수축 또는 신축에 대한 논의도 잠잠하여졌고, 따라서 그 사업에 대한 기록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의 압력에 의하였던 것으로, 우리 자체의 국방의 포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병자호란 때 겪은 치욕을 씻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썼던 것이다. 청과 화약을 맺은 인조 때만 하더라도 16년에 청이 명을 치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사(舟師, 수군(水軍))를 청하자 우리는 여러 가지 구실을 붙이어 기간을 끌면서 결국 그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또, 뒤에 의주목사(義州牧師) 임경업(林慶業)이 주사를 이끌고 청군과 더불어 명을 치게 되었으나 임경업은 명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19년에는 유림(柳琳)이 청군과 더불어 명의 금주성(錦州城)을 공격할 때 우리 군사는 명군에게 정확한 사격을 하지 않았는가 하면 헛총을 쏘았다. 또, 최명길이 임경업과 상의하여 비밀히 묘향산(妙香山)의 중 독보(獨步)를 명에 보내어 우리나라가 청의 강요로 하는 수 없이 군대를 냈다는 곡절을 밝히어 우리나라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그 사실은 뒤에 청에게 탄로되어 임경업은 명으로 망명하고 최명길은 청에 잡혀가는 바가 되었으나, 이러한 사실들은 국내적으로 성곽을 쌓고 국방력을 배양하지는 못하였어도 대외 활동을 통하여 청을 견제하고 그에게 항거한 구체적인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청에 대한 항거는 효종 때 북벌계획(北伐計劃)으로 구체화 되었다. 즉,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있을 때 소현세자와 더불어 8년간이나 청의 서울 심양에 인질로 잡혀가 갖은 고역을 다 치뤘고 또 앞서 남한산성의 치욕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청에 대한 복수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즉위하게 된 효종은 이완(李浣)을 훈련대장(訓練大將)으로 삼아 군사를 훈련하고,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청의 정벌을 의논하고 군비를 확장하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을 계획하는 등 북벌(北伐)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우리 힘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더욱이 효종이 즉위한 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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