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漢山城

41.세계유산 남한산성

동천 2014. 11. 24. 17:01

세계유산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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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동문인 좌익문(左翼門)에서부터 성벽일주를 시작하며...




남한산성 행궁




옹성(甕城)과 통하는 암문(暗門)







장경사신








암문












북문인 전승문(全勝門)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과 통하는 암문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에서 본 남산 방향




북한산 방향





서문인 우익문(右翼門)




성안에서 본 우익문(서문)



수어장대(守禦將臺)..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의 누각으로

남한산성에 있던 5개 장대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영춘정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제2남옹성치







제3남옹성 암문








망월사




성벽일주를 마치며 하산길에 건너다 본 동문(左翼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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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行宮)이란 왕이 서울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인조 2년(1624)에 짓기 시작해 인조 4년(1626)에 완성하였다.
행궁 중에서 유일하게 종묘사직 위패 봉안 시설을 갖추었으며, 상궐 73칸, 하궐 154칸 등
총 227칸으로 이루어진 행궁이었으나 1907년 일제가 불을 질러 터만 남게 되었다.
1999년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하고 경기도가 남한산성 복원공사에
착수해 2010년에 완전히 복원했다.(사진은 전시된 자료)





한남루(漢南樓)





외삼문(外三門)





수어장대의 옛모습(전시된 사진자료)




남문의 옛모습(전시된 사진자료)










외행전(外行殿)..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


일장각(日長閣).. 광주유수가 지내던 곳












내행전(內行殿).. 왕과 왕비의 침전









행각(行閣).. 수행원들이 머물던 곳



재덕당(在德堂)..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로 추측




좌승당(坐勝堂).. 광주유수의 집무용 건물






이위정(以威亭).. 활을 쏘기 위한 정자




후원(後苑)



좌전(左殿).. 유사시 종묘에 있는 선대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만든 건물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 공연








지수당(地水堂).. 헌종 13년에 지어진 정자로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한 곳



종각(鐘閣)




침괘정(枕戈亭)..정확하게 지어진 시기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1751년에 새롭게 고쳐 짓고 '침괘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다.



영월정(迎月亭)



숭렬전(崇烈殿)..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남한산성을
쌓을 때 책임자였던 이서장군을 모신 사당








연무관(演武館).. 인조 3년에 지은 군사훈련을 하기 위해 건립한 지휘소

1636년 12월 9일 만주족의 청나라군 9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해 왔다. 여기에 청나라에 복속하고 있던 몽골족 3만 명까지 조선 침략에 합세했다. 다름 아닌 병자호란이다.

 만주족의 침략에 대항해 조선은 평안도 일대에 사실상의 주력부대를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이들 방어병력 대부분은 산성에 포진했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 기병과 야지에서 결전을 벌여서는 승산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방어하기 유리한 산성에 병력을 배치한 것이다.

 이 같은 조선군의 대응에 청나라는 우회작전으로 대응했다. 대부분의 산성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통과해 버린 것. 거침없이 후방으로 파고드는 청군 때문에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도감 등 중앙군 정예부대와 일부 지방군들이 산성 안에 들어왔지만 병력은 겨우 1만3000여 명에 불과했다.

 국왕의 움직임을 추격한 청군 선봉부대는 이미 16일에 남한산성 부근에 출현했다. 조선 조정이 체계적 대응을 못 하고 당황할 동안 1637년 1월 1일께 청태종이 이끄는 적의 주력부대가 남한산성 부근에 도착했다.

각 지역의 지방군들이 국왕을 구출하기 위해 줄줄이 출전했지만 경기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와중에 일부 왕족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됐다.

 설상가상으로 남한산성의 식량이 부족했다. 성 안에 남은 식량으로는 1만3000여 명의 병력이 최대 50일도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도 채우지 못한 1637년 1월 30일 조선은 항복했다.

 이처럼 병자호란은 처절한 패전의 역사지만 그 참혹한 와중에도 승리의 역사는 있었다. 대표적인 전투가 김화 백전전투다.

1637년 1월 28일 평안도 관찰사(일명 감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절도사(병사) 유림이 지휘하는 5000여 명의 군대가 강원도 김화 남쪽의 산자락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조선군을 향해 청나라군이 공격을 가해 왔다.

 감사 홍명구가 지휘하는 부대는 격전 끝에 전멸했으나, 병사 유림이 지휘하는 군대는 승리했다.

박태보(1654∼1689)는 당시 전투를 직접 목격한 관노 유계홍의 증언을 근거로 조선군이 승리한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유 병사가 임시주둔지의 문을 닫고, 맞서 싸우면서 아군 패잔병과 적군을 들이지 않았다. 적이 이미 홍 감사의 군대를 격파하고, 승세를 타고 유 병사의 진을 공격하려 했는데, 유 병사 군이 화약무기를 일제히 발사했다. 적이 거의 죽어 후퇴하는 자가 적었다. 곧 다시 적이 진격해 왔는데, 탄환을 쏘아 맞추니, 종일토록 (유 병사의 진영이) 함락되지 않았다.”

 이 같은 기록은 박태보의 문집인 정재집(定齋集)에 ‘기김화백전지전(記金化栢戰之戰·사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글이지만,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의 승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몇 안 되는 사료 중 하나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박태보의 기록에 따르면 병사 유림은 일종의 임시 진지를 건설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적 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유림의 진영은 산능선을 타고 접근하기 쉽지 않은 언덕에 있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했다.

백전전투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남긴 송시열(1607~1689)도 병사 유림이 나무로 만든 급조 요새인 목책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형을 고려해 부대를 배치하고 그에 맞는 야전 축성을 했기 때문에 적 기병의 돌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재차 공격을 가해 왔지만, 유림 병사 휘하의 조선군은 또다시 적을 격퇴했다. 승리의 비결은 엄격한 사격 군기였다.

“적이 또 병사의 진을 향해 돌진하여 곧장 목책 밖 10여 보(步) 거리에 도달하자, 병사의 진에서 수많은 포(砲)를 일제히 발사하니, 적은 일시에 비로 쓴 듯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되었다. 하루종일 이렇게 싸워 적군의 사망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적은 마침내 패잔병을 수습해 달아났는데, 그 수가 처음에 비교하면 10분의 1도 못 되었다.”

 이처럼 유림 휘하의 조선군은 적 기병의 돌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적이 10여 보(12m)라는 근거리에 도달했을 때 집중사격을 가한 것이다.

유림은 이처럼 결정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적에 비해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해 그날 저녁 접적을 끊고 전장에서 철수했다.

 후퇴 과정도 탁월했다. 유림은 아군의 후퇴를 은폐하기 위해 조총의 화승을 이용해 일종의 자동사격장치를 만들었다.

화승의 길이로 발사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므로, 사람이 없이도 밤새도록 조총 소리가 나게 장치를 했다. 청군은 총소리를 근거로 조선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고 생각해 추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날 청군이 발견한 것은 조선군의 텅 빈 진지였다. 병사 유림의 기지 앞에 청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박태보는 “이 전투에서 적병의 전사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적이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웠는데 삼 일이나 지나 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군 전사자 시신을 태우는 데 3일이나 걸렸을 정도로 대승리였던 것이다.

 병자호란 백전전투는 지형을 고려한 부대 배치, 진지 축성, 사격 군기 등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기본 요소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전투다.

특히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적을 상대하더라도 기본적인 전술 원칙을 충실히 준수한다면 전투 경험이 부족한 군대도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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