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16.丙子胡亂時 義兵抗爭

동천 2020. 4. 18. 05:46

 

 

 

 

 

 

義兵抗爭史

■ 16.丙子胡亂時 義兵抗爭

丙子胡亂 때의 義兵 活動도
정묘호란 때와 같이
湖南地方이 가장 활발했다.
仁祖가 南漢山城에 包圍되어
나라의 運命이 危機에 直面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玉果縣監 [李興浡발].
大同察訪 [李起浡발].
淳昌縣監 [崔薀온].
前翰林 [梁曼容].
前察訪 [柳집] 等은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2월 19일,
仁祖의 敎書가 전해지자
의병 모집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募義廳을 설치하고
道內에 檄文을 전하는 한편
道에는 募義都有司를,
各邑에 募義有司를 두었는데......

[曺守城]. [曺엽] 等은 和順에서,
[柳玶]은 光州에서,
[金선]. [羅海鳳] 等은 羅州에서 起義하여

1월 20일, 여산에 집결한 호남 의병들은
大司諫으로 있던 [鄭弘溟명]이 召募使로 公州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나아가 [鄭弘溟=鄭澈 子]을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鄭弘溟] 義兵隊長은 당초 의병을 일으켰던
[李興浡발]. [李起浡발]. [崔薀온]. [梁曼容]. [柳집] 等
다섯 사람이 주축이 되어 출정에 나서 淸州에 이르렀을 때
仁祖가 南漢山城을 나와 淸에 屈伏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 이상의 진군을 포기하고 통곡하며 돌아갔다.

義僧軍으로는 정묘호란 시 4천 의승군을 이끌고 安州城의 수비에
협력한 바 있는 [明照大師]는 병자호란 때도 의승군을 이끌고
군량미 수백석을 충당하는데 조력했고

智異山 華嚴寺의 [碧巖覺性]은
義僧軍 수천명을 모아 [降魔軍항마군]이라 칭하고
北上途中 전쟁종결 소식 듣고 돌아갔다.

이렇듯 병자호란시의 의병은 난의 발발과 함께 각지에서 봉기하였으나
단기간에 전쟁 종결로 남한산성의 위기에 기여하지는 못하고 만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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