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난입하여 明聖王后를 학살한 일제가 친일내각을 수립하고,
그 친일내각이 그해 11월 15일 단발령을 발포하자 의병이 전국에서 일시에 일어났다.
이때 의병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주로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었다고
갑오농민전쟁으로 고양된 반일의식이 민족사회에 팽배해 있던 때였으므로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아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1896년 2월에 이르러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이어 단발령의 취소와 함께
의병들의 요구를 거의 수용하자 대부분의 의병은 해산했으나
[柳麟錫]·[閔龍鎬]· [金道鉉] 等 의병은 일본에 이어 러시아의 정치간섭에 계속 항거하다가
1896년 10월 15일 [金道鉉] 의병진의 해산으로 1단계 의병전쟁은 끝났으나,
[柳麟錫]과 [閔龍鎬] 의병진은 해산을 거부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
2단계 의병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일제가 대외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정부를 강압하여 [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하고 군용지를 강점하는 등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침략을 본격화한 데 대항하여 乙巳義兵이 일어난다.
한일의정서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는데
침략에 대하여 가장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던 것은 당시의 농민이었다.
일제가 1905년에 일제는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요하다가 고종이 끝내 비준을 거부하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빼앗고 내정을 간섭하는 統監府를 설치했다.
3단계의병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전해지고,
을사조약의 비준을 거부하던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쫓겨나고 순종이 즉위한 데 이어,
韓日新協約:丁未七條約이 강제 체결되어 을사조약을 추인한 뒤에
일제 통감부의 감독체제가 수립되고
8월 1일부터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국민적 저항으로 일어난 의병전쟁이 丁未義兵이다
3단계 정미의병은 해산군인이 의병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전술면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국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어
1907년 12월에 楊州에서 [허위]·[김규식]·[연기우] 등이 주도하는 연합의병 진영으로
13도창의대를 결성하여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서울진공작전을 단행했지만
1908년 1월 동대문 밖 30리(12㎞) 격전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그후에도 그해 5월까지 서울의 북방 임진강에 거점을 두고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했으나 실패했다.
1908년 5월에 이르면 의병전선에서 용맹을 떨치던
[허위]·[이강년]·[민긍호]·[신돌석] 등이 전사하거나 잡혀 순국하고,
그후부터 의병진은 주로 평민의병장이 이끌고 항전했다.
이때 의병전쟁은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의 지방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단계와 2단계 의병 때는 다른 지역보다 뒤늦게 봉기한 호남지방의 의병이었으나,
3단계 의병에서는 특히 1908년 여름 이후에 호남 전역에 걸쳐 의병전쟁이 전개되었고,
1910년에는 전국 교전 회수의 47%가 호남에서 전개될 정도로 격렬한 항전을 보였다.
그것은 이 지방에 일본인 농장이 많이 침투한 데 대한 농민의 저항이 가장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1909년 9, 10월에 걸쳐 ' 남한대토벌작전'을 감행, 호남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3단계 의병전쟁은
1,2단계 의병 때와 달리
국민전쟁 양상을 띠었고
평민의병진이 발달했으며,
1908년 5월 이후에는
소규모의 유격작전으로
항전하는 게릴라전이
확산되어갔다.
1,2단계 의병은 관군과도
싸웠으나 군대 해산된
3단계 의병부터는 일본군과의 싸움이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침략 속에서 안주하는 부호나
一進會와 같은 일본군 앞잡이에 대한 응징 공격도 폭넓게 전개되었다.
<사진>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湖南義兵長들 ,
앞줄 왼쪽부터 , [宋丙雲] , [吳成述], [李江山], [牟千年], [姜武京], [李永俊] ,
뒷줄 왼쪽부터 , [黃壯一)], [金元局] , [梁鎭汝] , [沈南一], [曺圭文, [安桂洪],
[金丙喆] , [姜士文] , [羅聖化] 의병장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이 감행된 이후인 1909년 11월부터
의병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였고
독립군으로 전환한 의병진은 대부분 산악의 게릴라 부대로 활동했다.
1907년 12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전개된 서울탈환작전이 실패한 후 유인석·안중근 등이
연해주로 망명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폈듯이,
해외독립군으로의 전환은 1908년 여름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1909년 이후 독립군으로 전환한 의병장에는 [洪範圖]·[李鎭龍]·[朴長浩]·[全德元] 등이 있다.
義兵將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洪範圖]였으며,
그외에도 [柳麟錫]·[李範允]·[安重根] 등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망명하여
크라스노키[烟秋]를 근거지로 국내진격작전을 수행하다가,
1909년 3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哈爾賓]으로 출동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연해주 의병은 1910년 봄에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활약하면서 독립군의 기초를 닦았다.
한편 국내의 의병은 秋哥嶺地溝帶·太白山·智異山 등의 깊은 산골로 들어가 소수 부대의
유격전으로 항전했는데, 이때에 호남지방에서 폭넓은 항전이 전개되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