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15. [鄭鳳壽]의 龍骨山城 戰鬪

동천 2020. 4. 17. 14:51

 

 

 

 

 

 

義兵抗爭史

■15. [鄭鳳壽]의 龍骨山城 戰鬪


후금군은 1627년 3월 3일,
강화가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明將 [모문용]을 체포한 다음
철군한다는 구실로
평양지역에
주둔,
군사들이 사방에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이같은 후금군의 만행에
관서지방 의병들은
자위의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조정에서도
의병활동을 은근히 지지하니
곳곳에서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중 가장 치열했던 것이 龍骨山城戰鬪이다.

龍骨山城은 의주와 철산 중간지점에 위치한 높이 477m의 지형이 험준한 천연요새이었다.
당시 이 산성에는 鐵山,靈山,義州 等地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前 청산-영산의 현감을 역임한 바 있는 [鄭鳳壽]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추대된 [鄭鳳壽]는 4천여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산성 출신 [金宗敏]을 中軍으로,
彌串僉使(미관처사) [張士俊].[李光立] 等과 함께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孤立無援의 龍骨山城 守城은 성공키 어렵다 하여
철수시켜 화를 피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山城 固守 決意를 굽히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鄭鳳壽]의 계획을  허락하는 동시 前職 縣監의 계급으로는 명령계통이
제대로 서지 않을 것을 우려하고 堂上官으로 特進시켜 평안도의 수령직이 비면
제수하기로 하는 한편, [張士俊] 또한 郭山郡守에 제수하고 산성을 固守토록 하였다.

그런데 [張士俊]이 변심하여 후금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격노한 의병장 [鄭鳳壽]는 [張士俊]과 동조자 10여명을 처단하였다.
이 때는 이미 조정과 후금간에 강화가 성립되어 관군과의 전투는
중지된 상태였으나 의병의 항거는 계속되고 있었다.

하여, 3월 17일,
후금군은 의주.창성.곽산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를 총동원하여
새벽부터 종일토록 5차에 걸쳐 의병 근거지인 龍骨山城을 공격하였다.

결과,
적을 수백기나  사살한 반면,
義兵의 死傷者는 10여명에 불과하여
정묘호란 발발 이후 대승전을 거두었다.

조정에서는 [鄭鳳壽]에게 龍川府使 兼 助防長을 제수하고
유공자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여 사기를 진작시켰다. 

後金軍은 강화 성립 후인데도 朝鮮義兵의  계속된 저항을 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하자
조정에서도 후금군이 강화조건을 위반하고 강토에 잔유하면서 약탈을 자행한 자위적
전투임을 강조하고 조속한 전면철수를 요구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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