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관서지방의병 활동

동천 2020. 4. 17. 10:15

 

 

 

 

 

 

義兵抗爭史 

 ■14-1. 정묘호란 시 關西地方 義兵抗爭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는데...
 후금은  명나라를
정벌하기 앞서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후환을 없이하고
조선과의 通交로
무역상의 이득을
취함으로써 자국의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려
하였다.


하여,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1627년 1월 13일, 그
의 從兄 [阿敏]을
司令官으로 삼아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한편, 조선은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인 데다
인조반정 세력은  정권 안정을 위한 都城防衛와 西北邊防衛의 강화가 중요 현안이었다.

하여,
[張晩]을 都元帥로 삼아 평양에 본영을 설치케 하고
[李适]을 平安兵使 兼 副元帥로 삼아 寧邊에 駐在하면서 西北邊을 방어토록 하였다.
 
그런데
仁祖 2년 ,반정공신 [李适]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西北邊의 방어보다 도성 방위체제 강화에 중점을 두게 됨으로써 조선의 군사적 방어체제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국의 군사력을 집중, 통합 운용할 지휘체계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여,
후금군 주력이 郭山에 이르러 凌漢山城을 포위하니 定州牧使 [金搢],
郭山 郡守 [朴惟建] 等은 포로가 되고 宣川副使는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1월 21일, 安州城이 함락되니
평안병사 [南以興], 牧使 [金俊] 等은 화약으로 自焚(자분)하여 비장한 죽음을 택하였고
平安監司 [尹喧], 黃海兵使 [丁好恕] 等은  적이 오기도 전에 후퇴해버렸다.

인조는 중신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兵曹判書 [張晩]을 都元帥로 명하여 적에 대항케 하는 한편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 勤王兵을 모집케 하고
領中樞府事 [李元翼] 等은 世子를 호위하여 全州로,
仁祖는 領議政 [尹昉] 等 중신을 이끌고 강화로 피난하였다.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