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동천 2020. 4. 16. 20:10

 

 

 

 

 

 

 

 

義兵抗爭史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왜군은 평양성이 피탈된 후
서울로 총퇴각 하였고,
의병들에 의해 各地城 間
교통이 차단되면서 식량난으로
위기감이 고조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반전이
일어나나 했던 전황은
행주 대첩으로 인하여
주도권이 조선-명 연합군측으로
기울어 심각한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한 왜군은 결국 개전 1년만인 1593년 3월에 부산포로 총퇴각하게 되고,
퇴각후 왜군은 6월 초부터 慶尙右道 및 全羅道 공략과 동시 화전양면책을 시도한다.

이에 따라
6월15일에는 함안을,
6월 16일에는 班城을,
6월 18일에는 낙동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격한다.


한편,조선군은
全羅兵使 [宣居怡]와 忠淸 조방장 [洪秀男] 等이 함안을 방어하고,
성주목사가 된 郭再祐 等이 鼎岩津을,
진주목사 [徐禮元], 판관 [成守慶] 等이 晋州를 방어함으로써
함안 서쪽을 장악하여 적의 공세에 대비했다,

진주성에서는 예상외의 강력한 왜적의 공세에 직면하여 공성으로 둘 것인가?
고수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지 못하여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흩어져 버렸고 다만,
전라 우의병장(경상우병사) [崔慶會],
충청병사 [黃進],
거제현령 [金俊民],
해미현감 [鄭名世],
좌의병부장이었던 사천현감 [張潤],
복수의병장 [高從厚],
의병장 [李재련],
의병장 [閔汝雲],
의병장 [姜希輔] 等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倡義使 [金千鎰]과 같이 晋州城으로 入城함으로써
晋州城에는 官軍 3천명과 義兵 2천 8백명, 시민 5만명이 고립된 상태하에
倡義使 [金千鎰]의 지휘하에 9만 왜적과 결전을 대비하게 되었다.

 

#2 .아 전력

왜군

조선군

공격제대

적장

병력

병력()

의병장

비고

1(북쪽)

加藤淸正

25,624

의병:2,800

관군:3,000

 

본문참조

 

2(서쪽)

小西行長

26,182

3(동쪽)

宇喜多秀家

18,822

4(예비)

毛利秀元

13,600

5(예비)

小早川隆景

8,744

 

92,972

5,800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