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10. [鄭文孚]의 鏡城戰鬪
敵將 [加藤淸正]은 군사를 길주 이남에만 배치한 후, 鏡城에는 叛賊 [鞠世弼]을, 會寧에는 叛賊 [鞠景仁] 等을 배치하여 군민의 행정을 統轄하게 하고 자신은 豆滿江邊에서 安邊으로 돌아갔다.
[鄭文孚]는 오랫동안 경성 유생인 [池達源]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池達源]은 [鄭文孚]와 봉기하기로 하고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는 데수일만에 前 萬戶 [姜文佑]를 비롯하여 향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고 또 산중에 숨어 있던 鐘城府使 [鄭見龍]과 慶源府使 [吳應대] 等이호응해 왔다.
임진년 9월 15일, 의병장 [鄭文孚]는 義兵旗를 세우고 鏡城의 叛賊 [鞠世弼]을 공격하게 되었다.
왜적으로 부터 兵使로 임명되어 鏡城을 지키고 있던 [鞠世弼]은 의병들의 기습공격에 당황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완강히 저항하다가.
[姜文佑]의 위협과 설득 끝에 [鞠世弼]은 마음을 돌려 성문을 열고 의병을 맞아들였다.
하여 [鄭文孚]는 우선 성내 軍民의 附逆行爲를 묻지 않기로 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니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또 鏡城의 무사인 [金嗣사朱]와 경성 사람 [吳璞박] 等이 정병을 이끌고 합류해 온 것을 비롯하여 경흥부사 [羅廷彦]. 고령 첨사 [柳擎경天] 군관 [吳大男] 等이 호응해 왔다.
[鄭文孚]는 鐘城府使 [鄭見龍]에게 대장이 될 것을 권유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여 권유에 의하여 [鄭文孚]는 의병대장이 되어 함경도 관군과 의병을 총지휘하였다.
길주성에서 1,5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적장 [加藤右馬允] 等은 鏡城 狀況을 확인하기 위하여 100여 명의 정찰대를 급파하였다.
적이 출현하자 성문을 굳게 닫고 대치하고 있던 아군은 [姜文佑]가 결사의 기마대 20 여기로 써 성문을 열고 돌격해 나가자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永康驛에 이르는 사이에 모조리 쓰러 뜨으렷다.
그는 밤늦게까지 용전 분투하여 적의 수급 수십 기를 베어 말안장에 메달고 인마가 피범벅이 되어 복귀하니 사기가 충천하였다. 의병대장 [鄭文孚]는 六鎭에 격문을 보내어 [鞠世弼]을 비롯한 반적 일당 13명을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히게 하였다.
회령 유생 [申世俊]은 심복들과 힘을 합하여 叛賊 [鞠景仁]을 죽이고 여러 邑과 鎭을 모두 수복하였다.
하여 두 왕자를 포박하여 왜적에게 넘겨준 [鞠景仁]과 판관 [이흥업]을 적에게 잡아 바친 [鞠世弼]을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또 왜적이 주둔 중인 길주와 가장 가까운 明川 반란 장수인 [鄭末秀]도 [鄭文孚]가 보낸 [具滉]과 [姜文佑] 휘하 60여 騎의 기습을 받아 도두 하다 죽었다.
하여 10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明川 이북의 반 란진은 완전히 수복되었으며 흩어진 장졸들이 재집 결하여 수비를 강화하고 치안을 회복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