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7. 官.義 聯合軍의 慶州城戰鬪
왜적은 곽재우 의병군의 공격으로 형풍-창녕- 영산을 포기함에따라 낙동강 보급선을 상실하게 되었고,
영천성 마저 탈취당함으로써 안동 보급선이 차단 당하자
마지막 보급선인 양산-밀양-청도-대구-안동-문경-충주를 잇는 中路의 동측방을 보호하기 위해 경주성을 확보코자 심혈을 기우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 양산성을 수비하던 병력 중 정병 5백여명을 선발, 언양에 증파하여 경주성 부근의 의병소탕에 나서게 된다.
한편,경주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경주인 [金虎]는 초유사 金誠一로부터 義兵都大將 명을 받고 8월 2일, 義兵1,400여명을 지휘하여 언양 방면으로 진군하여 증파되었던 왜적을 포위 공격하자 왜적들은 4분5열 되어 경주 본진으로 퇴패하였다.
이후,安康에 있던 慶尙左兵使 [朴晉]은 [權應銖].[장세아] 휘하의 의병과더불어 左道16개 읍의 군사 10,000여명을 모두 집결시키고는
☞8월 20일, [권응수].[정세아]및 경주판관 [朴毅의長]을 선봉으로 경주성을 지키고 있는 적장 [多川內記] 부대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朴晉]은 성밖 민가에 불을 질러 화염으로 시야를 가린 후 성을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경주성 동쪽 4km의 계곡에 사전 잠복하고 있던 왜군의 배후 기습을 받음과 동시 성안의 적군들이 성문을 열고 출격하여 [朴晉]의 군사들은 전.후로 협공 역포위 당하하게 되어 포위망을 뚫고 필사적으로 안강 본진으로 후퇴하였으나 600여명에 이르는 큰 피해를 당하였다.
☞9월 8일, 전열을 정비한 [朴晉]은 경주판관 [朴毅長]이 거느리는 선발대가 야간행군으로 안강을 출발, 慶州城을 포위 고착시키고 [朴晉] 자신이 이끄는 4천명 군사가 포위에 가담 화공작전과 유인 섬멸작전을 전개 하였다.
포위 부대는 화포장 [李長孫]이 만든 飛擊震天雷를 처음 사용한 전투로 이 신무기로 맹렬한 사격을 가하면서 慶州城 南門을 逃走路로 열어 도망가게 한 후, 길목에 배치한 1천 여명의 매복병으로 기습공격하게 하였다.
마침내 적은 패주 울산방면으로 도주하였고 5개월만에 慶州城은 수복하게 되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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