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6.[權應銖]의 永川城戰鬪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공략을 시작으로, 4월 14일,
[小西行長]의 군대가
부산성 점령에 이어.
제2제대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제3제대인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제4제대부터 제9제대가
조선에 상륙하여 육상으로는 3 路로 구분하여 공격하였다.
그 중 제2제대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 이끄는 부대는 左路를 선택하여 4월 19일에는 언양, 21일에는 경주를 점령했고, 22일에는 영천으로 진격했다.
倭軍이 나타나자 永川城을 지키던 군수 [金潤國]은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無血入城한 倭軍은 城에 1,000여 명의 군사만 남겨 둔 채 주력부대는 신녕현·비안면·용궁현을 거쳐 忠州 방향으로 북진하였다.
영천에 주둔한 왜군이 읍성을 거점으로 약탈과 방화 및 살육을 자행하자, 5월 초, 永川 儒學者 [鄭世雅],·[鄭大任], 신녕 武人 [權應銖] 等이 聯合戰線을 형성한다.
義兵隊長에 추대된 權應銖는
☞1592년 7월 23일 읍성 남쪽 楸坪
[현재 주남들]에 의병 본부를 설치하고
경주를 비롯하여 신녕·하양·자인·의성·의흥·
흥해·의흥·영일·대구 등지에 있던 관군과
의병 3,560~3,970여 명을 집결하여
의병연합군을 [倡義精勇軍]이라 칭하고,
별장 김윤국, 좌총 신해, 우총 최문병,
중총 정대임, 전봉장 洪天賚,
贊畵從事 정세아·정담으로 정한 다음
전 병력을 左·右·中 3 隊로 나누어 공격제대를 편성한다.
☞7월24일, 倡義精勇軍 大長 [權應銖]는 軍令系統을 확립하고
決死抗戰의 戰意를 고취하기 위하여 全軍에 다음 같은 행위자는
斬刑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嚴命을 내린다.
첫째, 겁을 먹고 함부로 말하는 자.
둘째,적을 보고 5보 이상 물러서는 자.
셋째,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
넷째,싸움에 임하여 대오를 잃는 자.
하여,의병 본부는 군기와 군율을 수립하고,
지형과 지세를 고려한 작전 계획을 논의하였다.
특히 영천 지역의 계절풍 ‘건들매’[음력 7, 8월에 부는 산들바람]를
이용한 火攻戰을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7월 26일,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튿날, 조직 편대에 따라 주력 부대는 동문과 남문을,
권응수와 박의 장군은 서문과 북문을 공략하여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서북풍을 이용한 화공을 펼쳐 마침내 왜군을 섬멸시키고 永川城을 奪還, 조선인 포로 1,090여 명을 구했다.
전투가 끝난 7월 28일 점검 결과 아군은 사망 83명, 부상 238명으로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말 200필, 총과 창검 900여 자루를 노획했다.
영천성을 수복함에 따라 경주·영천·안동을 잇는 보급로가 차단되어 안동 이하 영남 좌도에 주둔하던 왜군들은 상주 지방으로 철수했으며, 영천의 왜군은 경주로 후퇴하였다.
영천성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초기 아군이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로서 영남의 巨城인 慶州邑城 탈환에도 큰 자극을 주었고. 경상좌도의 여러 읍을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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