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5.[高敬命]의 錦山城戰鬪

동천 2020. 4. 14. 06:12



義兵抗爭史

■ 5.[高敬命]의 錦山城戰鬪

[高敬命]은
동래부사 시절 파직,
고향 장흥에서 지내던 중
60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을 맞아
5월 29일, 潭陽 秋城館에
祭壇을 만들어 나라를 위해 목숨바칠 것을 맹세하고
義兵廳을 설치,義兵旗를
높이 세우니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게 된다.

☞7월 8일, 倭將 [小早川隆景]은 梨峙戰鬪에서 權慄軍에게 敗退하여
1만 5000여 명의 병력이 錦山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차후
완산을 거쳐 전라도로 침공해 올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첩보를 입수한 [高敬命]은 한성을 향해 북상하려던 것을 , 눈앞의 적을
먼저 물리친 후 북상하기로 계획을 수정하여 금산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7월 9일, 고경명의 의병군은 珍山에 집결, [郭嶸]이 이끄는 관군과
합동작전으로 梨峙 동북쪽의 錦山城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高敬命]은 좌.우.중 3개의 공격제대와 30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로 편성,

    -좌.우는 방어사 [郭嶸]관군이,
    -중앙은 [高敬命] 자신이 맡아 錦山城 을 향해 공격하고,
    -특공대로 하여금 城門을 파괴하도록 하여 성안을 압박해 갔다.

그러나 적의 저항이 이외로 완강하여 별 진전 없이 날이 저물자
방어사 [郭嶸]휘하 관군은 더이상 공격하지 않고 본진으로 철수해 버렸다.

☞7월 10일 여명을 기하여, 왜군은 아군의 진중 상황을 탐색하고자
성중에 납치하고 있던 우리 남녀를 설득하여 거짓 으로 성을 탈출,
간첩활동을 하여 의병보다 관군이 전투력과 전의에 있어
취약하다는 진중상황을 적에게 알려주었다.


이튿날, 왜군은 간첩이 알려준 정보에 따라 전병력을 투입
관군을 목표로 포위 공격하니 영암군수 [金成憲]이 이끄는 관군이 도주하자

의병들이 [관군이 무너졌다]소리치니 義兵陣은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관군을 석권한 왜적들은 총공세를 가해오자 [高敬命]은 그의 차남
[인후]와 같이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고 만다.

그러나 그의 장남 [종후]는 혈로를 뚫고 탈출에 성공하여 생존한 의병들을
다시 수습하여 復讐軍을 이라 칭하고 대왜항쟁에 힘쓰다가
제2차 晋州城戰鬪에 참가하여 조국을 위해 산화하였다.

이 錦山城戰鬪는 관군과 의병의 聯合作戰 실패로 패배하였지만
왜군의 전주 지역 진출을 저지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義兵抗爭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 7. 官.義 聯合軍의 慶州城戰鬪  (0) 2020.04.14
■ 6.[權應銖]의 永川城戰鬪   (0) 2020.04.14
■ 4.郭再祐의 鼎岩津 戰鬪   (0) 2020.04.13
■ 3.義兵의 蜂起  (0) 2020.04.08
■ 2. 壬辰倭亂勃發   (0) 2020.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