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8. 官義僧 聯合軍의 淸州城 戰鬪
明軍의 참전에 따라 長期籠城戰이 불가피함을 인식한 日軍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湖南으로의 진출을 생각하게 되었고 [히치 스카 이에마사]가 지휘하는 倭 제5군 후방부대는 중간 거점으로 淸州를 설정, 6월 23일경에 淸州城을 점령하게 된다.
이에 忠淸道 방위 책임자인 巡察使 [尹國馨]은 防禦使 [이옥]과 [조방자], [尹慶祺]로 하여금 淸州城을 공략하게 하였으나 [이옥]이 지휘하는 官軍은 淸州城 공략에 실패하였다.
하여, [趙憲] 義兵將의 총지휘 하에 , 靈圭大師의 僧兵과 [朴春茂]의 淸州 義兵 그리고 연기현에 주둔하고 있는 [이옥]의 官軍 등이 合軍하여 倭軍에게 함락되었던 淸州城을 탈환하게 하였다.
이들 官義兵 合同軍은 淸州城을 탈환하기 위해 8월 1일 새벽에 각각 西門과 南門으로 나누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날, 전투는 종일 계속되었고 성벽에 기어올라 성안으로 진입할 무렵, 별안간 뇌성을 동반한 폭포 같이 소낙비가 쏟아져 官.義兵은 일단 후퇴하여 관망하고 있는데 이날 밤, 한 여인이 뛰쳐나와 말하기를
왜적들이 사기가 꺾여 싸울 의지를 잃은 것 같아 보이며 의병들을 欺瞞하기 위해 횃불을 켜고 깃발을 세워두고 도망칠 듯하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이에, [趙憲] 義兵將은 적의 계락이 아닐까 의심하였으나 動靜을 살핀 결과 사실임을 확인하고 이튿날 날이 밝기 전에 진격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淸州城을 收復하게 되었다.
청주성의 탈환은 단순히 청주 지역만의 회복이 아니라, 왜군이 湖南地域과 忠淸右道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은 것이다.
또한 청주성 전투에서는 義, 僧, 官軍이 聯合하여 승리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종전까지 관군은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패배 내지는 미리 도망함으로써 의병과는 불신관계를 초래하여 합일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였지만 청주성 전투에서는 대규모 연합세력을 구성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청주성 전투에서는 이 지역 출신의 의병들이 직접 참여하여 승리하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鄕土文化전자대전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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