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9. 二次 錦山城 戰鬪

동천 2020. 4. 15. 06:25

 

 

 

 

 

 

 

義兵抗爭史

■ 9. 二次 錦山城 戰鬪

1592년 7월 10일에 있었던 1次 錦山戰鬪에서 [高敬命]의 의병대와 관군의
연합부대가 錦山城의 탈환을 시도하였다가 潰滅되었었고
이후로 몇몇 의병대와 조선관군이 성의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8월 1일, 淸州에서 [히치 스카 이에마사]가 지휘하는 倭 第5軍 後方部隊를
격파하여 淸州城을 탈환한 義兵將 [趙憲]과 僧兵長 [영규], 그들의
다음 목표는 조선군이 번번이 탈환에 실패한 錦山城이었다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고바야카]와 [다카 카케]의 왜5군은 1만 명,
거기다 왜5군은 그간 전라도의 침공을 여러 번 시도하여 조선군과의
전투 경험도 여러번 쌓은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었다.


[趙憲]과 [영규]의 연합부대는
의병 1,000여명과 승병 800여 명으로
구성된 약 1,800여명의 부대였다
錦山城의 倭5軍은 1만 대군이어서
자신들 힘만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여서
[趙憲]은 각지의 관군과 의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은 병력의 낭비를 우려하여 거절,
전라도 관찰사 [권율]은 금산성의 중요도가 낮다고 판단하여 거절,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역시 다른 지역들의 우선도가 더 높다고
판단하여 거절,
거의 모든 관군과 의병대가 조헌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였다.

결국 [趙憲]과 [영규]는 단독으로 금산성을 공략하러 진군하였다.

진군 도중에 충청도 관찰사 [허욱]이 전령을 보내와
금산성 공략을 금지하는 경고를 하였고,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이 의병대를 가로막아
진군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사유로 그들이 금산성에 도달하였을 때는 의병 300여 명이 부대를
이탈하여 최종적으로 의병 700, 승병 800의 1,500의 병력만이 남아 있었다.

8월 17일, [고바야카와]는 [趙憲]의 부대가 후방지원이 없는
단독 소부대인 것을 파악하여 그들을 포위 섬멸하려 하였다.

승병장 영규는 이대로는 승산이 없으니 조헌에게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이 적은 본래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것인데도 내가 속히 싸우려고
하는 것은 오직 충의의 격동으로 사기가 한창인 이때를 이용하려는 것이오."
라고 답하며 계속 싸우기를 원하였다.

☞이튿날 새벽, [고바야카와]는 비교적 진영이 잘 꾸려진
[영규]의 승군보단, [趙憲]의 의병대를 먼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趙憲]의 의병대가 무너지자 [영규]의 승병대까지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지며 義兵將 [趙憲]이 먼저 전사하였고, 뒤이어
僧兵長 [영규] 역시 도피를 건의하였지만 듣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 전투가 끝난 다음날

조헌의 동생인 [조범]이
형의 시신을 수습하였고,

☞8월 22일,
[趙憲]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장렬히 전사한 義僧兵의
장례를 치르고
[七百義士塚]이라고
이름을 붙여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총 병력은 1,500명이었는데 왜 700명인가?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언제 왜군이 다시 올지 몰라서 급히 조헌의 병력만 수습해서
   칠백의사총을 만들었고 나머지 승군들의 시신은 방치했다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에 팽배하였던 불교 천시사상에 의한 불상사였다.
   물론 선조에게 직접 임명을 받은
   8도 도통관 사명당 정도 되는 스님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평범한 승병장이었던 영규로서는 당시엔 큰 의미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불교의 위상이 비교적 높아진 것은 임진왜란의 중반 이후부터였다.
   이로 인해 현대까지도 불교계에서는 칠백의총을 천오백의총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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