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11.[정문부]의길주장평 전투

동천 2020. 4. 15. 20:12

 

 

 

 

義兵抗爭史

■11. [정문부]의 길주 장평 전투


의병대장 [정문부]는
임진년 9월 16일 경성전투에서
적을 격파하고 반적 [국경인]과
[정말수]를 처단하고 경성지역을
안정시키자
[韓仁濟] 等 여러 장수가
호응하여 병력이 수천명에
달하게 되었다.

하여 [李應星]에게 군사 700명을 주어
鏡城을 지키게 하고

10월 21일, [정문부]는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明川으로 나아가 陣을 치니 길주목사 [鄭熙績]과
輸城察訪 [崔東望]이 1,000여명 병력을 이끌고 합세했다.

왜적은 吉州城內에 1,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300명의 군사는 길주 남쪽 80리 거리인 嶺東館 柵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은 10명에서 100명씩 떼지어 다니며 나무도 베고 사방 촌가에 약탈과 살상 등
횡포가 극심하였다.


[정문부]는 이러한 왜적 무리들을 단호히 소탕하기로 결심하고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진군의 북을 크게 울리니 鏡城 남쪽에 戰馬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다.

[정문부] 휘하의 1,000명 병력으로써
*[정문부]와 중위장[정 견룡]은 明川地域에 400명을 배치,
*주위 복병장이 이끄는 400명은 吉州에서 明川에 이르는 요충지 선임 지역에 배치하고
종사관 복병장이 이끄는 200명은 아간 창 지역에 배치하고 장덕산에 올라 적을 관찰한다.
길주 군사 1,000명은 해촌지역 일대에 배치하여 단천과 길주 사이의 적을 사살한다.

10월 30일,만반의 준비를 끝낸 시점에 왜적 약 1,000여 명이 깃발을 앞세우고
吉州城門을 나와 海汀加坡里 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 이 왜적들은 가옥을 불태우고 재물과 가축을 노략질 하였으며 부녀자를 납치하였다.


적정을 감시하던 특파대장 [원충서]는 長坪石嶺에서 적의 대부대를 유인하고
복 병장 [한인제]는 300명을 이끌고 원충서 군과 협격하여 닥치는 대로 적을 베었다.

이날의 기상은 북풍이 뼈에 스며들 정도로 매우 차가워 따뜻한 기후조건에
살았던 왜적들로서는 고통이여서 사기가 급락했다.

오후 4시경부터 일몰때까지 서로 버티다가 마침내 왜적은 힘이 다하였는지
길주성 동쪽 長德山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좌위복병장인 [高敬民]이 장덕산을 차단, 포위 격멸하였다.

이 전투로 포로를 구출하고 약탈당한 가축 100여 마리를 되찾았으며
8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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