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12-1. [金千鎰]의 第二次 晋州城 戰鬪
왜군은 평양성이 피탈된 후 서울로 총퇴각 하였고, 의병들에 의해 各地城 間 교통이 차단되면서 식량난으로 위기감이 고조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반전이 일어나나 했던 전황은 행주 대첩으로 인하여 주도권이 조선-명 연합군측으로 기울어 심각한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한 왜군은 결국 개전 1년만인 1593년 3월에 부산포로 총퇴각하게 되고, 퇴각후 왜군은 6월 초부터 慶尙右道 및 全羅道 공략과 동시 화전양면책을 시도한다.
이에 따라 6월15일에는 함안을, 6월 16일에는 班城을, 6월 18일에는 낙동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격한다.
한편,조선군은 全羅兵使 [宣居怡]와 忠淸 조방장 [洪秀男] 等이 함안을 방어하고, 성주목사가 된 郭再祐 等이 鼎岩津을, 진주목사 [徐禮元], 판관 [成守慶] 等이 晋州를 방어함으로써 함안 서쪽을 장악하여 적의 공세에 대비했다,
진주성에서는 예상외의 강력한 왜적의 공세에 직면하여 공성으로 둘 것인가? 고수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지 못하여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흩어져 버렸고 다만, 전라 우의병장(경상우병사) [崔慶會], 충청병사 [黃進], 거제현령 [金俊民], 해미현감 [鄭名世], 좌의병부장이었던 사천현감 [張潤], 복수의병장 [高從厚], 의병장 [李재련], 의병장 [閔汝雲], 의병장 [姜希輔] 等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倡義使 [金千鎰]과 같이 晋州城으로 入城함으로써 晋州城에는 官軍 3천명과 義兵 2천 8백명, 시민 5만명이 고립된 상태하에 倡義使 [金千鎰]의 지휘하에 9만 왜적과 결전을 대비하게 되었다.
표#2 피.아 전력
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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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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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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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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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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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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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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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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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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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藤淸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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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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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2,800
관군: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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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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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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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西行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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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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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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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喜多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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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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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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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利秀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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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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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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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早川隆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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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4
|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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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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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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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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