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0.京畿義兵의 南漢山城戰鬪

동천 2020. 4. 19. 07:24

 

 

 

 


 

義兵抗爭史


■ 20.京畿義兵의 南漢山城戰鬪


南漢山城 戰鬪는 [利川首倡義所]가 南漢山城에 입성한 뒤 
  양근 의병진과 연합하여 치른 큰 전투였다.

[이천수 창의 소]가 남한산성에 입성한 때는 1896년 2월 28일이고,
입성 계기는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있던 [심진원]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이천수 창의 소]가 입성한 뒤 곧 양근의 [李錫容] 의병진도 합세해 세 의병진의
연합 의병진이 구성되었다.

당시 연합 의병진의 병력 규모는
약 1,000여 명의 관포수를 포함해 1,600여 명에 달했고,
남한산성에는 군수물자가 ‘산같이’ 쌓여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지였기 때문에
연합 의병진은 여러 면에서 강력한 의병부대의 조건을 갖추었다.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서울 進攻戰을 3단계로 계획되었다.

☞1단계는 수원 부근의 의병들이 수원을 점령하고,

☞2단계는 수원 의병진과 남한산성 의병진이
              남한산성 주변에 주둔한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하고,

☞3단계는 삼남 지역의 의병들이 연합해 서울로 진격,
              일본군을 구축하고 러시아공사관에 체류 중인
              고종을 환궁시킨다는 것이었다.


남한산성에 도착한 義兵隊將 [朴準英]은

軍師 [김하락]은 왕래지휘.
선봉장 [김태원]은 南門.
左翼將 [김귀성]은 東門.
右翼將 [김경성]은 西門.
中軍將 [구연영]은 中央.
後軍將 [신용희]는 北門을
각각 책임지도록 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서울의 친위대 3개 중대와 강화도의 주둔병 2개 소대를 출동시켜
倭軍 後援下에 南門, 東門, 北門에 1개 중대씩, 西門에 2개소대를
배치하여 교통을 차단하고 포위 공격할 태세를 취하였다.

하여, 관군 부대는 1차 남한산성 요새를 공격해 보았으나
의병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을 포기하고 회유 쪽으로 전환하였다.


의병: "관군 너희가 의병을 토벌한다면 이 나라의 관군이 아니라
         왜적으로 간주하여 토벌하겠다."라고 하자


관군은 의병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간파하고 의병대장을 꾀었다.


관군 : "만약 歸化하면 대장은 光州留守에 임명하고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자"

☞3월 21일 밤,
     벼슬에 눈이 어두워진 
     의병대장 [박준영]은  
      관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소를 잡아 의병들에게
      술을 먹여 잠들게 한 후

☞22일 새벽 4시경,
      서문과 북문을 열어 놓자
       기다리고 있던 관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입성했다.

그제야 속은 것을 안 의병들은 
대장 있는 곳으로 달려가
박준영의 3 부자를 잡아 총살하고
뿔뿔이 흩어지니 남한산성 입성
20일 만에 함락되고 만다.

남한산성에서의 패전으로 제3단계 서울 진공 전 계획은 사라지고
이천 의병은 큰 손상을 입었으나 불꽃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후 영남으로 이동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