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1-2.[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동천 2020. 4. 19. 17:17

 

 

 

 

 

 


 

義兵抗爭史


■ 21-2. [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충주는 중부권의 20여 개 고을을
관할하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징도 있었지만
당시 충주 관찰사 [김규식]은
친일개화파 [박영효]의
지시로 단발령을 비롯한
개화 정책을 주도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柳麟錫] 의병대장은
충주성을 1목표로 공격,
이를 장악 함으로써
서울로 나가는 거점을 확보하여
청일전쟁 때 부산에서 서울까지
설치하였던 일본군의 통신선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사진/유인석의 춘천 옛집>

☞ 호좌 의병은 2월 16일 출진하여 그날 院西에서 1 泊 하고
☞2월 17일,북한강 상류 북창 나루를 건너 곧바로 忠州府를 공격하였다.

관군과 왜군은 문루에 올라 최후의 저항을 하였지만 치열한 공방전 끝에
충주성을 함락하였다.

하여, 충주관찰사 [김규식]은 관병을 동원하고 일본군 수비대의
도움을 얻으려 하였으나 일본군은 의병의 엄청난 수에 놀라 달아났고
도주하던 김규식은 충주성의 남문에서 체포하여 반역 죄목으로
목을 베어 북문에 높이 매달았다.

한편, 충주성을 뺏긴 왜군과 관군은 水安堡에 기지를 두고
중앙의 援兵을 支援받아 의병 입성 다음날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2월 22일,
     수백 명의 일본군이 달천으로 진격해 오자 중군장 [이춘영]은 포 군을 동원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수안보 공격을 단행하였다.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이춘영] 부대의 공격에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선두에서 지휘하던 [이춘영]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쏜 탄환에 맞아 전사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1896년 2월 29일,
         일본군은 병력을 더욱 확충하여 2일 동안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성 밖에서의 물자 지원이 차단되어
          군량 보급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3월 2일,
      호좌 의병과 일본군 간에는 충주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전투는 을미의병운동 당시 의병이 일본군과 치른 전투 중
      [김하락] 의병의 남한산성 전투와 함께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이때 의병 측은 [주용규] 등 6명이 전사하고 대포를 빼앗기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일간에 걸친 전투로 충주성은 모든 건물이 불타고 민가 100호만이 남았을 정도로
      폐허로 변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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