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3.慶尙義兵陣의 安東戰鬪
경상도의 의병 봉기는 먼저 퇴계 [李滉]과 서예 [유성용]의 고향이요 儒林의 중심지로 알려진 安東地方에서 일어났다.
☞1896년 1월 17일, 안동의 儒生들은 단발령 직후 儒生 [郭鐘錫]. 都事 [金道和]. 持平 [金興洛]等 223명이 향년 60세의 [權世淵]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통문을 돌려 倡義를 외치니 [안동 의병진]은 10여 일 만에 그 수가 4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월 28일, 의병 봉기로 도망갔던 安東觀察使 [金奭中]이 친위대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니 급조되고 훈련이 미숙한 의병들이 감당해 내지 못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權世淵]은 2개월 만에 의병장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하지만 오랫동안 抗日思想으로 뭉쳐있던 이지방 인사들의 氣槪는 꺾이지 않았다.
[權世淵]의 뒤를 이은 [金道鉉]은 安東 淸凉山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기회를 노려 安東府에 再入城하여 白馬를 잡아 피를 마시며 盟誓하고 그들의 大義를 위한 詩 한수를 지었다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 늙은 이 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나섰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펴는 중에 굽힘 있고/ 굽힘 중에 펴는 것이 / 泰岳도 鴻毛도 /다 같이 한 티끌이라오 / 밝고 맑은 이 마음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 /천일을 돌리는 그 일인들 /어찌 될 수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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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맹세가 있은 뒤 왜의 편이라 인정되는 醴泉郡守 [柳仁馨].義城郡守 [李觀永]. 盈德郡守 [鄭在寬]을 잡아다 참형하고
각 진의 군상 와 연합하여 尙州 所在 적 병참기지를 공격하여 적 수십 명을 베고 醴泉으로 회군하니 醴泉義兵陣의 군사만도 3,000여 명에 이르렀다.
☞3월 29일, 동맹한 3,000명 모든 의병진이 3월 그믐께 咸昌 태봉에 있는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진군하고 있었고,
적 측에서도 대구 주둔 수비대를 증원받아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9시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이 공방전에서 왜군의 결사적인 공세에 밀려 의병진이 무너지기 시작, 부득이 후퇴하여 차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4월 2일, 그런데 증원 왔던 대구 주둔 수비대 제3대대는 안동부에 들어가 의병의 종적을 찾는다며 시가와 민가에 불을 지르니 바람새를 탄 불길이 온 읍내를 덮쳐 1,000여 호의 민가가 불타버려 의병 전투기 간 중에 가장 큰 피해를 기록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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