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3.慶尙義兵陣의 安東戰鬪

동천 2020. 4. 21. 06:51

 

 

 

義兵抗爭史


■ 23.慶尙義兵陣의 安東戰鬪


경상도의 의병 봉기는 먼저 퇴계 [李滉]과 서예 [유성용]의
고향이요 儒林의 중심지로 알려진 安東地方에서 일어났다.

☞1896년 1월 17일, 안동의 儒生들은 단발령 직후 儒生 [郭鐘錫].
都事 [金道和]. 持平 [金興洛]等 223명이 향년 60세의 [權世淵]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통문을 돌려 倡義를 외치니 [안동 의병진]은
10여 일 만에 그 수가 4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월 28일, 의병 봉기로 도망갔던 安東觀察使 [金奭中]이 친위대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니 급조되고 훈련이 미숙한 의병들이 감당해 내지 못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權世淵]은 2개월 만에 의병장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하지만 오랫동안 抗日思想으로 뭉쳐있던
이지방 인사들의 氣槪는 꺾이지 않았다.

[權世淵]의 뒤를 이은 [金道鉉]은
安東 淸凉山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기회를 노려 安東府에 再入城하여
白馬를 잡아 피를 마시며 盟誓하고
그들의 大義를 위한 詩 한수를 지었다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 늙은 이 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나섰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펴는 중에 굽힘 있고/ 굽힘 중에 펴는 것이 / 泰岳도 鴻毛도 /다 같이 한 티끌이라오 /
밝고 맑은 이 마음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 /천일을 돌리는 그 일인들 /어찌 될 수 없으리


이상과 같이 맹세가 있은 뒤 왜의 편이라 인정되는 
醴泉郡守 [柳仁馨].義城郡守 [李觀永]. 盈德郡守 [鄭在寬]을 잡아다 참형하고

각 진의 군상 와 연합하여 尙州 所在 적 병참기지를 공격하여 적 수십 명을 베고
醴泉으로 회군하니 醴泉義兵陣의 군사만도 3,000여 명에 이르렀다.

☞3월 29일, 동맹한 3,000명 모든 의병진이 3월 그믐께 咸昌 태봉에 있는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진군하고 있었고,

적 측에서도 대구 주둔 수비대를  증원받아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9시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이 공방전에서 왜군의 결사적인 공세에 밀려 의병진이 무너지기 시작,
부득이 후퇴하여 차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4월 2일, 그런데  증원 왔던 대구 주둔 수비대 제3대대는 안동부에 들어가
               의병의 종적을 찾는다며 시가와 민가에 불을 지르니
               바람새를 탄 불길이 온 읍내를 덮쳐 1,000여 호의
               민가가 불타버려 의병 전투기 간 중에
                가장 큰 피해를 기록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