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한국의 토지를 일제의 군용지로 수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으며, ☞8월에는 재정 외교 고문을 파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1905년 9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오츠머츠조약]이 체결되고전쟁이 일제의 승리로 돌아가자 일제는 즉각 영국과는 [영.일동맹]. 미국과는 [가쓰라-TAFT협약]을 체결하고 이들 열강의 양해 하에 朝鮮을 保護國化하는 工作을 꾸미게 된다. ☞1905년 11월, ☞1905년 11월 17일, [伊藤博文]은 각료 한사람 한사람에게 개별적으로 회유하고위협하여 강제로 소위 [乙巳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때 참정대신 [韓圭卨설]은 결사반대하다 감금당하고 적극적으로 찬성한 것은 학부대신 [李完用]뿐이었다. 그외 협박에 굴복하여 찬성한 대신은 *외부대신[朴齊純] *내부대신[李址鎔] *군부대신[李根澤] *농상공부대신[權重顯] 等으로 민족의 의사를 배반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乙巳五賊]이라 부르고 있다. 협박으로 체결된 [乙巳條約]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 개항장과 주요시장에는 이사청이 설치되어 정치,경제적으로 명실공히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乙巳條約]이 발표되자 민중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시작, 서울에서의 항일 언론운동과 상소운동은 지방 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抗日 言論運動은 ☞11월20일 皇城新聞 주필 [張志淵]이 사설에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였고, ☞ 大韓每日新報가 [민족정기를 민중에게]를 실어 의거를 호소했다. 중요한 상소운동은 ☞11월 8일, [이상형]이 국왕에게 조약의 인준을 거부하도록 상소하였고 ☞이어 [十三道 儒約所]를 대표한 [안병찬]의 상소가 있었으며, ☞11월 23일 [조형세]의 상소 등이 있었는데 ☞[閔泳煥][李偰(설)]은 상소를 계속하다가 자결하였고 ☞특히 [崔益鉉]의 상소운동은 의병 궐기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상소 운동이 일본의 포악한 탄압으로 한계점에 달했을 때 "衛正斥邪思想"으로 무장된 이들에게는 3가지 행동 즉, 1.憤死-2.五賊暗殺計劃-3.義兵이 그 것이다. 丙午義兵의 특성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데 대한 가장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던 것은 농민이었으며 乙未義兵의 [國讎報復]에서 [國權回復]이 당면과제로 부각되어 투쟁의 목표가 명확하게 일제와 친일관리에게로 향하게 되고 운동이 민족성을 띠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는 데 있다. 표#6
* "衛正斥邪思想"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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