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7. [閔宗植]의 洪(州)城戰鬪
丙午義兵 中에서 가장 大規模 活動으로 日帝 軍警과 격전을 벌였던 義兵陣은 [閔宗植=사진]의 洪城義兵이었다.
洪城은 乙未義兵 때도 [김복한]. [이설] 等을 비롯한 전직 관리와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이 봉기 항쟁했던 곳이고,
1906년 3월 중순경에도 먼저 [林秉瓚]. [朴昌魯]. [蔡光默]등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아 홍성을 점거하려다 실패한 곳이다.
하여, 1906년 5월 11일, 참판을 역임한 바 있는 [閔宗植]은 [金光祐]. [趙羲洙]. [鄭在鎬]. [黃英秀] 等과 홍산에 모여 擧義할 것을 결의하고 舒川에 다다르니 의병수가 1천여명에 이르고, 板橋 - 藍浦 입성 때는 1만 군사로 증가했다.
의병진은 계속 행진하여 保寧을 지나 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1906년 5월 19일, 대포를 앞세우고 洪城을 진격하여 무난히 洪城을 점거하고
군사를 6대로 나누어 4대 문 각 요소를 엄중 수비하는 한편 소를 잡아 구국항쟁의 결사를 맹세하고 다음과 같이 부서를 선임, 체제를 정비했다.
표#
*창의대장-민종식
*참모장-김광우.조희수.채광묵
*참모사-안병찬. 박창로. 안항식. 신복균. 이용규. 이식
선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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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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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 돌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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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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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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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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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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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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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수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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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
박영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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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이세영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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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경도/
남계원
안 병립
곽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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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구
송순묵
송순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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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년
홍순대
홍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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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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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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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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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현
성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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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閔宗植] 의병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때문에 홍주성을 빼앗긴 왜군은 다음날부터 城 탈환작전을 전개했는데.......
駐韓 倭軍 司令官 [長谷川]은 서울 남문 수비대장 [本條]에게 지시하여 보. 포. 기. 헌병으로 구성된 2개 중대를 급파함과 동시에 홍성. 공주. 진주의 한국 진위대 및 왜군의 헌병. 경찰대를 모두 홍성 탈환에 투입함으로써 실로 근래에 없는 대병력의 출동이었다.
☞5월 31일, 의병부대와 왜군. 경 간에 치열한 홍성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6월 1일 새벽 2시경 큰 폭음과 함께 城의 東門을 파괴하고 대공세를 가하니 백병전을 벌이며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 의병 83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체포되고 결국 홍성은 함락되고 만다.
城을 탈출한 [閔宗植]과 일부 의병장들은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해상을 거쳐 扶安 - 興德 - 高敞 等을 지나며 왜군을 습격하는 등 활약을 계속하다가
☞1906년 11월 20일, 公州 塔山里에서 체포되어 ☞1907년 7월에 사형 판결받았으나 고종의 特赦로 석방되었다.
왜군의 헌병들은 의병의 扶餘에 있던 [閔宗植] 의병진의 참모로 활약했던 [이용규]의 부인 박 씨와 아들 [이성문/10살]을 잡아다 매질하며 義士의 행방을 묻자 아내 朴氏 : 신하는 나라를 위하여 죽고 여자는 남편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三綱五倫은 이것뿐이다. 나는 죽음이 있는 것만 알고 행방은 모른다"라고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으며,
아들 [성문]도 : "우리 아버지가 나라를 위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내가 죽는다 한들 일러 줄 수 없다" 고 말하여 대한 새싹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홍성 의병진 은 충청도와 전라도 각지에 흩어져 수십 또는 수백의 부대로 1907년 8월 전국 의병 항일전이 전개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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