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7. [閔宗植]의 洪(州)城戰鬪

동천 2020. 4. 22. 19:41

 

 

 

 

 

 

義兵抗爭史


■ 27. [閔宗植]의 洪(州)城戰鬪


丙午義兵 中에서 가장 大規模 活動으로
日帝 軍警과 격전을 벌였던 義兵陣은
[閔宗植=사진]의 洪城義兵이었다.

洪城은 乙未義兵 때도
[김복한]. [이설] 等을 비롯한
전직 관리와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이 봉기 항쟁했던 곳이고,

1906년 3월 중순경에도
먼저 [林秉瓚]. [朴昌魯]. [蔡光默]등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아 홍성을 점거하려다 실패한 곳이다.

하여, 1906년 5월 11일,
참판을 역임한 바 있는 [閔宗植]은
[金光祐]. [趙羲洙]. [鄭在鎬]. [黃英秀] 等과
홍산에 모여 擧義할 것을 결의하고 舒川에 다다르니
의병수가 1천여명에 이르고, 板橋 - 藍浦 입성 때는 1만 군사로 증가했다.

의병진은 계속 행진하여 保寧을 지나 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1906년 5월 19일, 대포를 앞세우고 洪城을 진격하여 무난히 洪城을 점거하고

군사를 6대로 나누어 4대 문 각 요소를 엄중 수비하는 한편 소를 잡아
구국항쟁의 결사를 맹세하고 다음과 같이 부서를 선임, 체제를 정비했다.

 

표#

*창의대장-민종식

*참모장-김광우.조희수.채광묵

*참모사-안병찬. 박창로. 안항식. 신복균. 이용규. 이식

선봉장

중군장

유격/
돌격장

좌군장

우 군장

소모장

수문장

후군장

식량
수송관

 

이남규

박영두

 

정재호

이세영

이세영

채경도/

남계원

안 병립

곽한일

윤필구

송순묵

송순묵

이병년

홍순대

홍순대

지우범

최선재

정해도

박세현

성재평


홍성의 [閔宗植] 의병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때문에 홍주성을 빼앗긴
왜군은 다음날부터
城 탈환작전을
전개했는데.......

駐韓 倭軍 司令官 [長谷川]은
서울 남문 수비대장 [本條]에게
지시하여 보. 포. 기. 헌병으로 구성된
2개 중대를 급파함과 동시에 홍성. 공주. 진주의
한국 진위대 및 왜군의 헌병. 경찰대를 모두 홍성 탈환에
투입함으로써 실로 근래에 없는 대병력의 출동이었다.

☞5월 31일, 의병부대와 왜군. 경 간에 치열한 홍성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6월 1일 새벽 2시경 큰 폭음과 함께 城의 東門을 파괴하고 대공세를 가하니
           백병전을 벌이며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 의병 83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체포되고 결국 홍성은 함락되고 만다.

           城을 탈출한 [閔宗植]과 일부 의병장들은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해상을 거쳐 扶安 - 興德 - 高敞 等을 지나며
           왜군을 습격하는 등 활약을 계속하다가

☞1906년 11월 20일, 公州 塔山里에서 체포되어
☞1907년 7월에 사형 판결받았으나 고종의 特赦로 석방되었다.

왜군의 헌병들은 의병의 扶餘에 있던 [閔宗植] 의병진의 참모로 활약했던
[이용규]의 부인 박 씨와 아들 [이성문/10살]을 잡아다 매질하며 義士의 행방을 묻자

아내 朴氏 :
신하는 나라를 위하여 죽고 여자는 남편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三綱五倫은 이것뿐이다.
나는 죽음이 있는 것만 알고 행방은 모른다"라고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으며,

아들 [성문]도 :

"우리 아버지가 나라를 위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내가 죽는다 한들 일러 줄 수 없다"
고 말하여 대한 새싹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홍성 의병진 은 충청도와 전라도 각지에 흩어져
수십 또는 수백의 부대로 1907년 8월 전국 의병 항일전이
전개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