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6.再起 義兵의 上疏와 蜂起

동천 2020. 4. 22. 09:53

 

 

 

 

 

 

 

義兵抗爭史


■ 26.再起 義兵의 上疏와 蜂起

丙午 義兵 中에서도 가장 먼저 再起한 地方은
[乙未義兵] 당시 [柳麟錫]을 중심으로 湖左義兵陣의
활동지였던 原州.堤川.丹陽을 중심으로 한 中部地方이었다.

乙巳條約이 있기 2개월 전인 1905년 2월 중순경, 義擧를 결정한 [元容八]은
많은 親知 志士 및 민중들의 호응을 얻어 1천여 명을 모집하여 훈련을 하면서
신망 있고 유능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원주 진위대는 [一進會員]들을 시켜 와해 공작을
하는 한편 [元容八]을 追跡, 橫城에서 체포하니 의병진은 와해되고 만다.

왜군 : [풀어주면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느냐?]

[元容八]:[동대문 밖에 나가면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다]

왜군 :[누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겠느냐?]

[元容八] :[호응하는 사람이 없으면 집안사람과 같이 하고,
집안사람도 呼應하지 않으면 나 혼자서 하겠다.]고 답하여


그는 大韓 男兒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3월 서울 옥중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病死하고 만다.

原州 義兵의 실패 소식을 들은 [鄭雲庚]은 [李圭錫]. [金鴻卿]. [姜秀明] 等과
단양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리고 의병을 모집하니 수일간에 3~4백 명의
장정들이 모집되었으나 이 역시 원주진위대의 급습을 받아
[정운경]이 체포되니 의거는 실패하고 만다.

중부지방에서 두차례나 체제도 갖추기 전에 해산됐지만
이것은 [원용팔]이나 [전운경] 중심의 의병부대 활동이 좌절되었다는
것이지 그 의병들이 아주 해산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각지에서 3~40명씩
혹은 3~400명씩 편성, 곳곳에 은폐하여 전선을 끊고 우편소, 집결지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무렵, 평안도 龍川出身
[全德元=사진]도 상경하여
유학자들로 구성된 13도 유학 소에
가담하여 [金東弼]. [경헌수] 等
당대의 쟁쟁한 선비들과 함께
조약의 무효화를 요청하는
上疏文을 내었지만
倭軍側의 방해로
高宗에게 전달되지 못하자
그 길로 고향으로 내려와
구국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全德元]은 자신의 재산을 틀어
무기를 구입하고 [金斗燮]. [張達彬] 등과
關西義兵陣을 편성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왜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15년의 선고를
받고 황해도 황주의 철 섬(鐵島)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大韓獨立團]을 組織, 軍事部長이 되어
10여 차례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