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6.再起 義兵의 上疏와 蜂起
丙午 義兵 中에서도 가장 먼저 再起한 地方은 [乙未義兵] 당시 [柳麟錫]을 중심으로 湖左義兵陣의 활동지였던 原州.堤川.丹陽을 중심으로 한 中部地方이었다.
乙巳條約이 있기 2개월 전인 1905년 2월 중순경, 義擧를 결정한 [元容八]은 많은 親知 志士 및 민중들의 호응을 얻어 1천여 명을 모집하여 훈련을 하면서 신망 있고 유능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원주 진위대는 [一進會員]들을 시켜 와해 공작을 하는 한편 [元容八]을 追跡, 橫城에서 체포하니 의병진은 와해되고 만다.
왜군 : [풀어주면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느냐?]
[元容八]:[동대문 밖에 나가면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다]
왜군 :[누구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겠느냐?]
[元容八] :[호응하는 사람이 없으면 집안사람과 같이 하고, 집안사람도 呼應하지 않으면 나 혼자서 하겠다.]고 답하여
그는 大韓 男兒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3월 서울 옥중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病死하고 만다.
原州 義兵의 실패 소식을 들은 [鄭雲庚]은 [李圭錫]. [金鴻卿]. [姜秀明] 等과 단양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리고 의병을 모집하니 수일간에 3~4백 명의 장정들이 모집되었으나 이 역시 원주진위대의 급습을 받아 [정운경]이 체포되니 의거는 실패하고 만다.
중부지방에서 두차례나 체제도 갖추기 전에 해산됐지만 이것은 [원용팔]이나 [전운경] 중심의 의병부대 활동이 좌절되었다는 것이지 그 의병들이 아주 해산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각지에서 3~40명씩 혹은 3~400명씩 편성, 곳곳에 은폐하여 전선을 끊고 우편소, 집결지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무렵, 평안도 龍川出身 [全德元=사진]도 상경하여 유학자들로 구성된 13도 유학 소에 가담하여 [金東弼]. [경헌수] 等 당대의 쟁쟁한 선비들과 함께 조약의 무효화를 요청하는 上疏文을 내었지만 倭軍側의 방해로 高宗에게 전달되지 못하자 그 길로 고향으로 내려와 구국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全德元]은 자신의 재산을 틀어 무기를 구입하고 [金斗燮]. [張達彬] 등과 關西義兵陣을 편성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왜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15년의 선고를 받고 황해도 황주의 철 섬(鐵島)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大韓獨立團]을 組織, 軍事部長이 되어 10여 차례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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