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8. [崔益鉉]義兵의 순창 유진
丙午義兵 중에서 군사적 행동은 미미하였지만 건국 의병 항쟁에 큰 영향을 미치고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표가 된 의병운동은 [崔益鉉]의 의병운동이다.
74세의 老學者인 그는 강직한 관리로 衛正斥邪運動을 전개하여 항상 抗日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강화조약 때 [5 불가론]의 상소로 전국 유생의 표상이 된 인물로 그의 행동은 곧 유림의 진로를 결정하는 좌표가 되었다.
3월 24일, [崔益鉉]은 前任實郡守 [임병찬]을 만나 동지 규 합을 시작하여 5월 23일, 泰仁 武城書院에서 門徒 80명을 모아 5 조약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6월 4일,향교에서 제사를 올리고 모여든 1,000여 명의 동지를 규합,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全州로 向하려다가 井邑과 內藏山을 迂廻하면서 방향을 바꿔 淳昌으로 진출하였다.
[崔益鉉]의 의병부대는 그의 사상의 완고성에 비해 군사활동은 미미한 편이라는 것을 알고 정부에서는 체포 명령을 내리고 전라북도 관찰사로 하여금 전위대를 출동시켜 체포하려 했다.
그는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일은 나는 차마 못하겠으니 물러가라 했지만 전주 진위대는 뒷산에서, 남원 진위대는 앞산에서 포위하여 포화를 집중하니 동포끼리의 전투를 꺼리는 [崔益鉉]은 의병들에게 퇴거를 명하고 싸우지도 않은 채 [임병찬] 이하 13명과 같이 스스로 체포되었다.
그의 의거 사실만으로도 전국의 유생과 국민을 격동시키는데 충분했고 그 후 각지에서 계속하여 항쟁하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
일제 측에서는 최익현을 서울로 압송, 회유와 협박으로 전향시키고자 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8월 하순 [임병찬]과 같이 對馬島로 압송, 감금하였다.
대마도에서의 [崔益鉉]은 굶어 죽을 것을 결심하고 왜놈 음식을 거절하였다. 74세의 노령이었던 그는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안병찬]에게 훗날 귀국하면 高宗皇帝에게 올리는 유서를 남기고 1907년 1월 1일 새벽 抗日救國運動의 巨星은 사라져 갔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