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4.慶尙義兵陣의 晋州戰鬪
진주지방에서는 高宗의 아관파천이 있은 1주일 후인 2월 19일, 儒學者 [盧應奎]는 同志 [徐再起]. [鄭道鉉].[[朴準弼]. [林景熙] 等과 의병을 모집, 향교 근처 집결하여 觀察府를 습격하고 순검들을 처단하니 觀察使 [趙東弼].警務官 [金世鎭] 等이 모두 도주하여 義兵陣은 무난히 晋州府를 차지할 수 있었다.
진주 경내에는 [鄭漢鎔]이 지방 의병을 모집하여 입성하니 진주 일대는 의병 세력으로 뒤덮었고 항일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한편, 의병진의 습격을 받아 大邱로 逃走했던 晋州 警務官 [金世鎭]이大邱 駐在 官軍 100명을 이끌고 진주로 향하던 중
의령에서 매복하여 기다리던 진주 의병의 先鋒將 [徐再起]의 습격으로 敗走하였다.
이렇게 되니 의병의 세력은 더욱 증가하여 진주. 사천. 고성 3 고을의 의병수가 1만여 명에 이르러 경상도 서남부지역을 장악하기 이르니
왜군 측은 대병력을 투입하고 관군 역시 병력을 증강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하면서 의병진에 이간책을 꾀하였다.
진주성에서는 적의 이간책에 속아 왜군의 대공세를 눈앞에 두고 성 밖의 의병장 [정한용]의 제의를 받아들여 진주성내에는 의병대장 [노응규=위 사진]만이 소수 의병만 남아 방어하고 다수 의병을 성 밖 100리~200리 거리에 배치하고 있었다.
하여, 진주성의 허술한 수비에 관군의 총공격을 받게 되니 삽시간 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의병대장 노응규가 성을 탈출하여 성 밖 의병장 정한용에게 달려가 보니 그는 이미 군사들을 전부 해산시키고 없었다.
그때 용장 [서재기]도 적의 간계에 속아 살해됨으로써 3개월 간에 걸쳐 이름 날렸던 진주 의병은 천추의 한을 남긴 채 흩어지고 만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