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1-3. [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충주성을 장악한 지 18일째인 ☞3월 5일, 호좌 의병은 일본군과 친일 관군의 양면 공격을 받고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고생하였다. 이에 의병장 [유인석]은 입성한 지 18일 만에 제천으로의 퇴각을 결정, 깊은 밤을 틈타 은밀히 충주성을 빠져나와 내주-淸風을 거쳐 堤川城으로 후퇴하였다.
☞4월 23일, 앞서 남한산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을 격파한 서울 관군과 왜군은 호서 의병의 남하를 서서히 추격하면서 지역 내 적군과 합세하니 戰雲은 짙어지게 된다. 하여, 관군은 신무기와 대병력으로 제천 성을 4면 포위 총공세를 가해 오니
☞5월 23일, 제천 성이 피탈되고 만다.
☞7월 11일, [유인석]은 제천 성을 빠져나와 영월-평창-강릉을 지나 大和에 도착하니 군부대신 명의로
" 대장 유인석을 생포하는 사람에게 1만 량의 상금을 준다"는 榜文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우, 사진>
☞7월 24일, [유인석] 대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楊口城을 공격 함락시킨 뒤
☞ 8월 10일, 함경도 영풍을 경유, 두만강을 건너 서간도에 진을 친 후 기회를 틈타 남하하여 항쟁하기로 결정하고
☞8월 28일 , 다시 한번 정부 백관에게 글을 보내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촉구한다. 표#
"... 국경을 나가 고국을 돌아보니 비통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지난 역사를 거울삼고 마음을 고쳐 내 몸보다 임금을 먼저 생각하고 내 집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여 원수의 도적을 토벌하고 응징하면 전일의 잘못을 누가 탓하랴. 이 사람 역시 만리밖에 있으며 기뻐 춤추며 환국하여 감사드릴 것이다. 여러분 집사의 권면과 노력을 붓을 멈추고 머리 들어 바라보며 축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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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麟錫]은 해외로 이동한 뒤에도 조국 광복 전선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1915년 이역만리 땅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建國 功勞勳章 復章을 追敍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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