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21-3.[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동천 2020. 4. 20. 15:03

 

 

 

 

 

 


 

義兵抗爭史


■ 21-3. [柳麟錫]의 忠州城戰鬪와 西北移動

충주성을 장악한 지 18일째인
☞3월 5일,
     호좌 의병은 일본군과 친일 관군의 양면 공격을 받고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고생하였다.
     이에 의병장 [유인석]은 입성한 지 18일 만에 제천으로의 퇴각을 결정, 깊은 밤을 틈타
     은밀히 충주성을 빠져나와 내주-淸風을 거쳐 堤川城으로 후퇴하였다.

 

☞4월 23일, 
      앞서 남한산성 공방전에서 의병진을 격파한 서울 관군과 왜군은
      호서 의병의 남하를 서서히 추격하면서 지역 내 적군과 합세하니 戰雲은 짙어지게 된다.
      하여, 관군은 신무기와 대병력으로 제천 성을 4면 포위 총공세를 가해 오니

☞5월 23일, 제천 성이 피탈되고 만다.

☞7월 11일, [유인석]은
      제천 성을 빠져나와
      영월-평창-강릉을 지나
      大和에 도착하니
       군부대신 명의로

" 대장 유인석을 생포하는
  사람에게 1만 량의 상금을 준다"는
  榜文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우, 사진>


☞7월 24일, [유인석] 대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楊口城을 공격 함락시킨 뒤

☞ 8월 10일, 함경도 영풍을 경유,
     두만강을 건너 서간도에
      진을 친 후 기회를 틈타
       남하하여 항쟁하기로 결정하고

☞8월 28일 , 다시 한번 정부 백관에게  글을 보내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촉구한다.
표#

"... 국경을 나가 고국을 돌아보니 비통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바라건대 여러분은  지난 역사를 거울삼고 마음을 고쳐 내 몸보다 임금을 먼저 생각하고
내 집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여 원수의 도적을 토벌하고 응징하면 전일의 잘못을
누가 탓하랴. 이 사람 역시 만리밖에 있으며 기뻐 춤추며 환국하여 감사드릴 것이다.
여러분 집사의 권면과 노력을 붓을 멈추고 머리 들어 바라보며 축원할 뿐이다."


[柳麟錫]은 해외로 이동한 뒤에도 조국 광복 전선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1915년 이역만리 땅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建國 功勞勳章 復章을 追敍하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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