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子胡亂

▣ 朝鮮의 軍事力

동천 2016. 9. 4. 06:13

▣ 朝鮮의 軍事力

이같은 상황하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의 군사력은
정권 보위의 핵심이라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훈련도감군 5천명 외에
실질적으로 전투를
담당할 수 있는

■중앙군으로
☞어영군 6천 여명,
☞총융군 2만여명,
☞수어군 1만 4천여명 수준이었고
☞지방군으로는 전국적으로 8-9만 명이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36-38개의 營과 이를 담당하는 전문 무관인
전담영장이 설치되면서 이러한 병력에 대한 지휘체계도 잡혔다.

하지만 광해군 치세부터 이어진 재정 문제로 인해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어려운 데다,
병력 증강을 서둘렀지만 사르후 전투와 이괄의 난에서 잃었던
2만~3만명 가량의 정예병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한 터라
사실상 중앙군은 1만여명에 불과한 정예병을 정묘호란 당시와
마찬가지로 도성을 비롯하여 남한산성, 수원, 개성, 강화도 등
수도권 요충지에 우선 배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적 진격로상에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는 곳은 [안주성]뿐인데 전쟁지휘부가 강화도로 들어가고
도원수가 산성으로 들어갈 경우 안주성은 고립될 수밖에 없으므로
도체찰사와 도원수를 사전 평안도로 보내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평안병사를 의주로 들여 보내 장졸들에게
"오로지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는
결의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최명길은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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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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