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31. 第三段階 丁未義兵
3단계의병은 1907년 7월, 국권회복을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를 위한 3가지 중요한 조치를 강구하게 되는데...........
☞첫째, 高宗을 강제 退位시키고 허약한 순종의 즉위시켰고, ☞둘째,정미7조약 체결을 강요, 통치권을 통감부로 하여금 장악케 하는 통치체제 강화와,
☞셋째, 8월 1일부터 대한제국군을 강제 해산 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나자, 이에 국민적 저항으로 일어난 의병전쟁이 丁未義兵이다
3단계 정미의병은 해산군인이 의병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전술면에서 크게 발전하였고 국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어
1907년 12월에 楊州에서 [허위]·[김규식]·[연기우] 등이 주도하는 연합의병 진영으로 13도창의대를 결성하여 이미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서울진공작전을 단행했지만
1908년 1월 동대문 밖 30리(12㎞) 격전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그후에도 그해 5월까지 서울의 북방 임진강에 거점을 두고 서울탈환작전을 수행했으나 실패했다.
1908년 5월에 이르면 의병전선에서 용맹을 떨치던 [허위]·[이강년]·[민긍호]·[신돌석] 등이 전사하거나 잡혀 순국하고, 그후부터 의병진은 주로 평민의병장이 이끌고 항전했다. 이때 의병전쟁은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의 지방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 2단계 의병 때는 다른 지역보다 뒤늦게 봉기한 호남지방의 의병이었으나, 3단계 의병에서는 특히 1908년 여름 이후에 호남 전역에 걸쳐 의병전쟁이 전개되었고, 1910년에는 전국 교전 회수의 47%가 호남에서 전개될 정도로 격렬한 항전을 보였다.
그것은 이 지방에 일본인 농장이 많이 침투한 데 대한 농민의 저항이 가장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1909년 9, 10월에 걸쳐 호남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3단계 의병전쟁은 1,2단계 의병 때와 달리 국민전쟁 양상을 띠었고 평민의병진이 발달했으며,
1908년 5월 이후에는 소규모의 유격작전으로 항전하는 게릴라전이 확산되어갔다.
1,2단계 의병은 관군과도 싸웠으나 군대 해산된 3단계 의병부터는 일본군과의 싸움이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침략 속에서 안주하는 부호나 一進會와 같은 일본군 앞잡이에 대한 응징 공격도 폭넓게 전개되었다.
<사진>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湖南義兵長들 , 앞줄 왼쪽부터 , [宋丙雲] , [吳成述], [李江山], [牟千年], [姜武京], [李永俊] , 뒷줄 왼쪽부터 , [黃壯一)], [金元局] , [梁鎭汝] , [沈南一], [曺圭文, [安桂洪], [金丙喆] , [姜士文] , [羅聖化] 의병장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이 감행된 이후인 1909년 11월부터 의병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였고 독립군으로 전환한 의병진은 대부분 산악의 게릴라 부대로 활동했다.
1907년 12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전개된 서울탈환작전이 실패한 후 유인석·안중근 등이 연해주로 망명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폈듯이, 해외독립군으로의 전환은 1908년 여름부터 추진되고 있었다.
1909년 이후 독립군으로 전환한 의병장에는 [洪範圖]·[李鎭龍]·[朴長浩]·[全德元] 등이 있다.
義兵將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洪範圖]였으며, 그외에도 [柳麟錫]·[李範允]·[安重根] 등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망명, [크라스노키]를 근거지로 국내진격작전을 수행하다가,
1909년 3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으로 출동, [伊藤博文]를 격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연해주 의병은 1910년 봄에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활약하면서 독립군의 기초를 닦았고.국내의 의병은 秋哥嶺地溝帶·太白山·智異山 등의 깊은 산골로 들어가 소수 부대의 유격전으로 항전했는데, 이때에 호남지방에서 폭넓은 항전이 전개되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