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33. [8월 1일 전투]
군대 해산령을 위하여 일본은 한반도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제 13사단 병력을 서울로 집결시키고 제12여단을 추가 파병하면서 군 해산 전까지 병력통제를 강화하였다.
7월31일 야간, 군부대신 [이병무]는 사전 포병전력을 일군에 넘기고
[순종]을 협박, 군대 해산 조칙 발표를 강요하고 이완용은 [이등방문]에게
군대 해산시 민심 동요 예방과 왕명을 위반하고 폭동시 진압할 것을 요청하였다.
8월 1일, 일제 한반도 주둔 사령관 [하세가와]가 대대장급 이상 장교 전원을 소집하여 장교들은 고용 보장한다고 하면서 [대한제국군 해산]령을 먼저 발표하고,
병들에게는 군대해산계획을 숨기고 [도수 훈련][공과금 지급] 명목으로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소집시키니 52.7%인 1,812명만이 참석하였는데 불안한 공기와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해산명령을 내리고 계급장을 뜯고
표#와 같이 미리 준비한 恩賜(사)金을 지급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이날,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대대장급 소집에 응하지 않고 휘하 선임 중대장을 대신 참석시켰는데 군대 해산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 울분은 참지 못하고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군인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죽은들 애석함이 없다] 라는 1통의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치고 권총 자결한다.
이 1통의 유서와 [대한제국 만세]라는 절규는 온 병영을 뒤흔들어 놓았다.
하여, 평소 믿고 따르던 지휘관을 잃은 휘하 병사들 가슴에 불을 붙여 대한제국군 최후의 저항은 軍籍이 사라져 버린 다음에야 시작되었다.
이렇게 병영이 어수선할 때 참위 [남상덕]이 [대대장이 죽음으로 義를 보였는데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라고 봉기를 主導하니 병사들은 곧 탄약고의 무기를 탈취하여 8월 1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제2연대 1대 대장 [이기표] 참령은 대한제국군 약화와 해산에 항의하다 해임되니 대대원들은 이에 반발하여 흥분한 상태에 있었는데 1 연대 1대대가 봉기하자 무기를 회수하고 있는 일본군을 습격, 항쟁에 참여하게 된다.
핵심 참여 인원은 1 연대 1대대와 2 연대 1대대 등 2개 대대였고 참여 인원은 각 대대 정원 500~600명 정도였는데 외부인원 300여 명 정도를 합쳐 1,000~1,500여 명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이미 대한제국군 병영 외부에 1개 중대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2개 중대와 공병대를 추가 파견하고 있었다.
대한제국군 병영내에서는 3시간여 동안 병영을 사수하려는 대한제국군과 진압하려는 일본군 간에 3시간여 치열하게 항전하다가 탄약이 바닥나고 있을 무렵, 노. 일전에 大 活躍했던 일본군 9중 대장 [가시하라]가 직접 공병대와 함께 대한제국군 병영 후문으로 진입함으로써 병영은 일본군 손에 넘어가고 만다.
이 전투에서 일군 중대장 [가시하라]도 죽고 우리의 [남상덕] 참위도 27세 꽃다운 나이에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준영] 참위도 임관된 지 하룻만에 전사하고 만다.
이날 대한제국 장병의 피해는 전사 68명 , 부상 100여 명 , 포로 518명이었으며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2개 대대 1,000 이상 병력을 전투 지휘한 것은 소대장이었다는 사실이다.
표# 한국군 해산 시 사졸 은급금 지급액
서울. 지방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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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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恩給(1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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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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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 *1년 이상 근속병
*1년 미만 근속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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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1,98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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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원
50원
2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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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20원
99,900원
45,12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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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진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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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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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587원 50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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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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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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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732원 50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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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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