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32. 舊韓末 軍事力
[1] 대원군 쇄국정책을 펴던 시기만 해도 조선군은 강군이었다.
*병인양요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격퇴.
*신미양요는 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긴 했는데 조선군이 너무 악착같이 싸워 결국
미군은 한양 진격 포기.
#대원군 실각하고 민비 외척이 득세하여 군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개판 5분 전 됨.
[2] 군사력 증강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개혁을 시작, 군사력 비약적 향상됨.
*군사학교 설립, 장교 양성, 국가예산의 30% 이상을 증액시켜 야포, 기관총 등 현대무기
도입하여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였으나 동학농민군 학살에 사용되었고,
*乙未事變 [閔妃弑害] 때 일본에 포섭된 훈련대와 왕궁을 지키던 시위대가 同族相殘함.
#명성황후 영화에 일본 무사들이 포졸을 학살하고 왕궁 진입 장면 나오는데....
실은 대한제국 정예군끼리 충돌하는 가슴 아픈 역사임.
[3] 대한제국군 구성
*친위대[수도 방위군] : 2개 연대 5~6개 대대
*시위대[근위대] : 2개 보병연대 4개 대대 +근위 기병대대. 군악대 + 왕궁 호위대
*진위대[지방 주둔군] :6개 연대 18개 대대
*총 병력수 : 25,000~30,000명 [각 연대 정원:약 1,000명.
*야포, 기관총의 양과 질은 일군에 앞서 영국, 독일군 등 유럽 열강과 동등 수준.
[4] 일본의 방해
*러. 일전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한반도 침탈을 가속화.
-친위대 - 폐지
-시위대 -2개 보병연대를 1개 보병연대로 개편.
-포병대대/기병대대를 중대규모로 축소하고 [시위 여단]으로 축소.
*결과적으로 병력을 1/3 수준으로 대폭 감소시켜 전술 단위가 축소.
[5] 군대 해산
*대한제국군을 축소했지만 존속시킨 이유는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할 수준으로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각 지역 치안 유지와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
최소한의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
*앞서 언급된 [崔益鉉]義兵將과 같은 사례에서 보듯
74세의 고령인 의병장 [崔益鉉]은 진위대와 대치하자
[저들은 황제 폐하의 군대다.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전투를 회피, 포로가 되어 대마도로 유배당한 것임.
*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대한제국 장병의 상당 수가 일본이 나라를 삼키려 하는데
의병 토벌에나 끌려다니는 현실에 불만을 가졌고 마침내 高宗이 조칙을 내려 시위대로 하여금 왕궁에 진입해 정권을 되찾아오려는 계획을 세움.
* 이런 사실을 군부대신[이병무]이 누설, 일본군은 경운궁을 봉쇄, 시위대 본영을 포위함.
* 당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과의 비율은 2:1로 우세했으나 군 수뇌부의 대다수가 친일파.
*두 세력 간의 알력이 상충하자 대한제국군이 부담스러운 위험요소가 되자
*일본은 외교권, 경찰권 등 대한제국 정부의 주권을 빼앗으며 군 해산 계획을 세움.
*군의 해산 구실은 재정 궁핍을 이유로 [傭兵主義]를 폐지하고 [徵兵法]을 시행한다며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군대를 해산. -작전에 필요한 조직 및 사관학교를 전면 폐지, -육군 1개 대대만 존치, 황궁 경호에 임하고 기타는 해산.
-군부를 비롯하여 육군과 관계되는 기관은 해산.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대한제국에 필요한 자를 제외하고 일본군에 복속시킨다.
-해산한 하사 및 병사 중 경찰관 유자격자는 경찰관 채용하고 기타는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케 하거나 둔전병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한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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