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56. 長沙洞 上陸作戰

동천 2020. 5. 23. 15:26

 

 

 

 

 

 

 

義兵抗爭史


■ 56. 長沙洞 上陸作戰

8월 하순, 대구에서 학도 의용대에 지원하여 
             密陽에서 창설된 유격대에 편입된 학도병 697명이
9월 8일, 육본 전투명령에 의거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들 학도는 육군본부
독립 유격대 1대대 요원들로서
대대장 [李明欽] 大尉의
이름을 따 일명 [明 部隊]라
불렀던 학도 특공대는

9월 10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長沙里上陸命令이 내려졌다.

이 작전은
연합군의 총반격 돌파구를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으로 마련된 것으로 이미
포항 근처에 布陣하고 있던 북괴 제5사단과 제12사단의 배후인
장사동에 상륙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자 막중한 임무였으므로
육군본부 작전국 담당관들도 학도 특공대들이 살아 돌아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9월 13일, 영국 구축함 1척에 승선하여 비밀리에 부산항을 떠나 목적지까지 인도하였으나
대대장 및 육본 인솔장교 몇몇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은 목표 해안에 도착할 때까지
주어진 임무를 알 수 없었다.

9월 14일 04:00시, 결전의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L.S.T 文山號[右사진]에 타고 있던 학도병 697명, 장교 35명, 선원 40명 등
772명의 특공대는 다가올 운명에 대하여 各自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날 기상은 [케지아]호 태풍으로 10m가 넘는 거센 파도는 2,700 ton수송선을
나무 조각처럼 뒤흔들었고 눈앞에는 새벽안개마저 짙게 깔려 있었는데....
소음 때문에 엔진을 끈 문산호는 거센 파도를 타고 안개를 헤치며 육지로 접근해 갔다.

잠시 후 뱃머리에 부딪치는 파도의 물보라가 안개 사이로 200m 고지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長沙洞을 상륙지점을 눈앞에 둔 수송선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을 때
적의 박격포탄이수송선 주위에 커다란 물기둥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배안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학도 특공대원의 무기는 적 후방에 침투하여 유격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였기에 적으로부터 노획한 낡은 따발총, 38식 장총, 조준대 없는 박격포 몇 문뿐이었다.

특별한 방법이 없는 이들에게
적의 공격은 계속되어 사상자만
늘어 갔고 설상가상으로
수송선 마져 육지 30m 전방에서
좌초되어 특공대원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공격과 승리만이
생존의 길이며 영광의 길임을
자각했다.

학도 특공대는 적의 포화와
풍랑이란 2중의적과 싸우며
가까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해변의 바위에 로프를 걸고
배와 연결했다.

근해에 대기하고 있던 영. 미군 함정이 함포로 적의 공격을
견제하였으며 미군기 4대로 해안의 적에게 폭탄을 퍼부었다.
이틈을 이용하여 로프에 매달려 육지에 기어오르는 학도 특공대원들은
적탄에 맞아 거센 파도에 휩쓸려 무수히 바닷속으로 숨져갔고 2개소대 정도가
해안 거점을 확보했을 때는 60여 명이 전사하고 70여 명이 부상하였다.

북괴의 해안선 방어병력은 2~3개중대 규모였다.

14:30분경, 거점을 확보한 학도 특공대는 후속 상륙 대원들과 함께
              상륙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203 고지를 점령했다.

날이 저물어 함포 사격과 항공 지원이 끊어지자 적은 탱크 4대를 앞세워 공격해 왔다.
학도 특공대는 총을 쏠 때마다 장전을 해야 하는 구식 장총은 노리쇠가 당겨지지 않아
발로 밟아 장전을 해야 했고 조준대도 없는 박격포 사격은 포탄이 머리 위에 솟았다가
바로 눈앞에 떨어지기도 하여 사상자가 늘어났지만 필사적으로 버티어 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철수를 결정하고 문산호로 후퇴하여 왔으나 여전히 배를 움직일 수 없었고
                 추격해 온 적은 문산호를 겨누어 해변에 포진했다.
                  학도특공대는 "앉아서 죽기보다 나가서 죽지"라고 외치며
                    수류탄을 들고 다시 한번 상륙전을 감행하였다.

뜻하지 아니한 이 기세에 눌린 적은 7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다시 후퇴하여 장사동 상륙작전의 목표는 일단 성공했다.
학도 특공대는 그 뒤 구조될 때까지 생존을 위한 결전을 계속하면서
적 후송대도 습격하고 후방시설도 파괴했다.

9월 20일, 해군 L.S.T.鳥致院號에 의해 주. 야  7일 만에 구조되는 순간까지
              10여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처절한 혈전 끝에 전사 129명, 실종 39명이었고
              귀환길의 특공대원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양동작전이 인천 상륙작전에 얼마만큼 기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북괴 평양방송은 국군 2개 연대가 상륙했다는 보도로 보아
장사동 상륙작전 성과는 크나큰 것이었다.

학도 특공대는 그해 12월, 해산될 때까지 중동부 전선에서
잔적 소탕에 국군과 행동을 함께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포항 북쪽 25km지점에 있는 이 조그마한 어촌에
한국전쟁 중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피를 뿌렸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