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57. 北進 砲兵隊

동천 2020. 6. 11. 21:06

 

 

 

 

 

 

 

 

 

義兵抗爭史


■ 57. 北進 砲兵隊 

1950년 10월 15일,
서울 용산중학교 교정에서 
341명 학도들이 [북진 포병대]를
조직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머리를 빡빡 깎은
15~16세 되는 어린
중학생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대학생도
끼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패주 하는 적을 추격하던 국군은
어느 정도의 포를 공급받았지만 포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포병은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반병 중에서 아무나 차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여, 7사단 포병단 제18포병대대 학도의 용 포병 모집 공고를 하였는 바,
적 치하에서 3개월간 숨을 죽이고 울분을 참아왔던 학도들은 돌파구를 찾은 듯 
서울시내 26개 중학교에서 지원자가 몰려들어  시험을 거쳐 선발된 인원은
용산中 100명, 덕수 상업中 30명, 서울 공업中 25명, 경동中 25명,
한양 공업中 20명, 서울中 11명, 경신中· 배재中 등
30여 개 학교 341명이었다. 

10월 18일, 제1진이,
10월 20일에는 제2진이 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향하였다.
군번도 없이 군복 아닌 교복에 교모를 쓴 채,
전선 대열에 나선 학도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군 당국은 빠르면 2개월, 늦으면 3개월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아무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학도 포병대는 개성-평양을 거쳐 10월 하순에 평안남도 順川에 도착하여 첫 전투에 참가하였다.
북쪽의 겨울은 남쪽보다 빨라 이따금씩 눈발이 흩날리고 살얼음도 끼어 제법 쌀쌀하기만 했다.
학도들은 북괴군이 남기고 간 누비옷을 구해 학생복 위에 껴입었다.
진격하는 국군을 뒤쫓아 지원 포사격을 하며 북으로 북으로 진군하노라면 신바람 나기도 했다.

順川-安州-价川 等평안도 곳곳에서 학도 포병대는 포술을 익히면서 싸웠고,
싸우면서 실전으로 익혔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해맑은 얼굴에 일이라곤 별로 해보지 않던 가녀린 팔로
포탄을 나르다 떨어뜨려 발등을 찍히기도 했다.
밤이 되면  보초를 서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에 놀라 사격을 하기도 했다.

학도 포병대가 잊지 못할  격전을 치른 妙香山 아래 德川 북방 전투에 투입될 때는
통신, 관측, 측지, 사격지휘 등 포병부대의 모든  분야를 독자적으로 맡을 만큼 숙달되어 있었다.

11월로 접어들면서 UN군의 파죽지세와 같은 공격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빠졌다.
때때로 중공군 개입이라는 소문이 현실로 다가서 왔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최전방의 다급한 포병 지원 요청에 급박한 상황임을 느낀 학도 포병대는
졸음을 못 이겨 자신도 모르게 쓸어져 가는 동료들을 일깨우며
사흘 동안 한잠도 자지 않고 포를 쏘아
포신이 녹아내릴 듯 달아올랐다.

11월 26일, 우려하던 것이 마침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다.
               25일 밤부터 계속 포를 쏘던 학도 포병대는
               26일 새벽 2시부터 사격지점이 가까운 곳으로 유도되기 시작하더니
               지면에서 거의 90도에 가깝도록 고개를 치켜들게 되었다.
               이것은 적이 우군 지역 직전에 육박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도 포병대가 자리 잡고 있던 지역은 묘향산을 70리 앞두고 묘 향산 산 능선이
부대 앞을 병풍처럼 둘러싼 지형에 진지의 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 능선 너머로 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어둠이 불안을 들어주고 있었다.
날이 새도록 주어진 사격지점에 효력사를 계속했다.
동동이 트면서 전방의 사격 요청도 좀 누그려졌다.
포탄에 손을 대면 손바닥이 철썩 달라붙는 강추위 속에 싸우던 학도들은
몰려오는 피로와 허기를 느꼈다.


이때가 아침 6시경,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국군부대가 몰려 내려오면서
앞과 좌, 우 3면의 능선에 중공군과 북괴군이 불쑥 나타났다.
응사할 여유도 없이 학도들은 白兵戰에 돌입했다.
어느새 후방에도 적이 나타났다.

2군단 전체가 포위된 상황이어서 학도 포병대는 저마다 임기응변으로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학도들은 포를 적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백병전을 벌이는 틈에 일부는 포에 달라붙어 공기를 빼냈다.

이렇게 하여 포위망을 탈출한 학도 포병 대원들은 굶으면서 산속을 헤매며
개성을 거쳐 참담한 모습으로 다시 서울에 되돌아와 왔을 땐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많은 전우를 잃었음을 알았다.

그 뒤 341명의 학도 포병대는
실종 112명,
명예제대 16명,
만기제대 145명,
장교 임관 68명의 기록을 남겼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