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53. 學徒 義勇軍 募集 背景

동천 2020. 5. 8. 16:09

 

 

 

 

 

 

 

 

義兵抗爭史


■ 53. 學徒義勇軍 募集 背景
▶ 전황

      북괴군은  천안까지  제4사단을 후속하던 제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방어에 개방되어 있는 호남지방으로 우회기동하여 질풍 같은 기세로


      ☞7월 19일, 금강을 넘어 익산으로 진출,

      ☞7월 20일, 전주,

      ☞7월 23일, 광주,

      ☞7월 25일, 순천 동쪽까지 진격, 140km 거리에 있는

    부산 공격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편,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7월 20일,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궤멸되자,
      ☞7월 18일에 영일만에 상륙한 미 제1기갑사단 주력을
                        영동 정면에 전개하여 경부 도로 전면을 방어토록 하고,
       ☞ 미 제24사단으로 부산 서측방의 거창-안의-진주-사천을,
       ☞ 미 제25사단으로 상주 정면을
       ☞ 한국군과의 작전지경선을 상주 북쪽에서 괴산 선으로 정하자


[정일권] 참모총장은

      ☞ 제7, 제9사단을 재편하여 전선을 정리하고,

    ☞ 훈련소를 개설, 보충 병력의 모집과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하였다.

 상황 1, 당시 병역법은 만 20세 이상이 입영 대상이었고,
             재학생은 26세까지 軍 입대 연기가 가능했다.


상황 2, 특히 미군과 체결된 협약에 의거 한국군은 10만 명 이상 보유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는 이미 10만 국군을 보유한 상태여서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3월,
            병사구 사령부와 지방 병무청을 해체한 상태에 있었다.

상황 3, 광복 후 학교內 좌. 우익 갈등으로 폭력사태가 빈발하자,

           정부는 1949년 1월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창설,
            배속장교 1명을 각 중학교에 파견하여 기초 군사훈련 담당


상황 4, 정부가 대전까지 피란, 전황이 다급해지자
7월 중순부터
            병력 동원이 가능한 지역인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에

            「병사구 사령부」를 설치하고 모병에 나서게 되고

             곧바로 호남 일대가 敵에게 유린당하고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다.

상황 5,  1950년 8월 9일, 미 국방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래
          한국軍 사상자 수를 3만 7000명(개전초 육군
약 9만5000명의 39%) 발표.
          총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아군은 약 20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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