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46. [洪範圖]의 鳳梧洞戰鬪
1920년 6월 4일 새벽,
[朴承吉]이 지휘하는 독립군 소대 3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鐘城 북방 5里 지점의 江陽洞으로 진입, 일본군 헌병 순찰 소를 격파한 뒤, 날이 저물무렵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다.
이 패배를 설욕하고자 일제는 南陽守備隊 소속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독립군을 추격케 하였으나 三屯子에 이르러 독립군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독립군이 반격하여 전멸시켰는데 이것이 鳳梧洞 戰鬪의 緖戰인 三屯子戰鬪이다. 鳳梧洞은 4면이 야산으로 둘러 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천연 요새지였고, 입구에서 25里에 걸쳐 하동, 중동, 상동 마을이 30~60호씩 몰려 살던 곳다.
日帝는 三屯子戰鬪 패배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羅南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즉시 [安川] 소좌가 이끄는 [越江追擊隊=220명]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 북간도에 진입, 독립군을 공격해 왔다. 이들은 안산 방면을 거쳐 高麗嶺을 향해 곧바로 봉오동 입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洪範圖]는 일본군 추격대의 진로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봉오동 주민을 모두 대피시킨 후, 험준한 4면 고지에 매복진을 편성하였다.
*[崔振東.安武]의 독립군 지휘부는東北部 산속에,
*[이천오]의 1중대는 봉오동 上村 西北端에,
*[강성모]의 2중대는 東山에, *[강시범]의 3중대는 北山에, *[조권식]의 4중대는 西山에,
[洪範圖]가 지휘하는 2개 중대는 西山 中北端에,
*신민단은 上村 南端에,
*군무 국 [이원]은 본부 병력과 잔여 병력으로 西山 最西北端에 위치하여 탄약 공급과 퇴로 차단 임무를 수행토록 계획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1920년 6월 7일 오후 1시경, [李化日]이 이끄는 일본군 추격대는 이 같은 상황을 모른 채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洪範圖]는 포위망 속으로 들어온 적을 향해 신호탄 발사와 동시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기습사격을 받은 일본 추격대는 [神谷] 중대와 [中西] 중대를 전방으로 하여 기관총 사격 지원 하에 결사적으로 돌격해 왔지만 사상자만 낼뿐이었다.
격전이 진행 중이던 오후 4시 40분경, 갑자기 천둥 번개를 치며 우박과 폭풍이 거세져 피. 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기상이 악화되자 홍범도는 퇴각 명령을 내렸으며, 이틈에 일본군도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포위망 속에서 3시간 동안 필사적인 저항을 하던 일본 추격대는 더 이상 응전하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독립군 2중 대장 [姜尙模]는 퇴각하는 일본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승첩의 전과는 일본군 사살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 鳳梧洞戰鬪는 日帝에게는 祖國光復을 기필코 達成하겠다는 民族의 뜨거운 鬪爭意志를 보여준 證票로 獨立戰爭의 始發點이 되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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