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37. [李康秊년]의 百潭寺戰鬪
[李康秊]은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출신으로 1879년 무과에 급제했으나 일제 치하의 관직을 버리고 귀향, 1896년 1월, 문경에서 처음으로 의진을 결성, 충북 제천의 호좌의 진에 합류해 유격장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다가 동년 7월에 의병을 일단 해산하고 10년간 [유인석] 밑에서 儒學 공부에 전념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이강년]은 1907년 8월에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하여, 강원. 충청. 경북 일대 八域同志에게 남긴 告訣文(이별을 고하는 글)에서 [싸움 30여 회에 죽여서 얻은 敵將의 머리만도 100여 개]라고 한 그대로 역전의 노장으로 그가 남긴 의병 투쟁사는 실로 위대하였다.
그가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는 여럿이지만 그중 백담사 전투가 유명하다.
1908년 3월 12일 새벽, 왜군 5백여명이 북쪽에서 공격해 온다는 파수꾼 보고를 받고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 좌. 우를 督戰하여 반나절 동안 격전 끝에 적이 敗走하자 이를 추격하여 수백 명을 사살함으로써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그 후 경북 日月山戰鬪, 奉化 乃城戰鬪, 安東 才山戰鬪, 忠州城 攻擊에서 보여준 유격 작전은 왜군에게 감히 토벌작전을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李康秊]은 애석하게도 6월 4일 청풍 까치 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1908년 10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는 자신의 말년 삶을 ‘13년 동안의 의병투쟁’이라고 표현했다. 단발령 뒤에 봉기하여 일제에게 붙잡힐 때까지 13년 동안 의병장으로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가 벌인 전투가 몇 번이고, 적을 몇이나 베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의 과정이 이강년에게는 전쟁이었고, 역사와 벌이는 투쟁이었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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